▨… 어느 경제학자는 “2014년 세계 경제학계의 최대 사건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썼다.(전강수·토마 피케티와 헨리 조지) ‘21세기 자본’의 출간이 그처럼 경제학계를 뒤흔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업자가 늘어나고 빈부의 격차가 증대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피케티가 밝히고 경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개선 요구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노동자, 농민들 같은 경제적 약자들이 더는 불평등을 인내할 수 없다며 거리로 뛰쳐나오고 시위에 가담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반복이 빚어내는 학습결과로 그 시위의 양상이 차츰 과격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가계소득으로 순환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우리 성결교회 목회자의 약 40퍼센트는 생계가 막막해 지원이 절실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도다.(한국성결신문 제1009호) 교단에 소속된 2755개 교회 가운데 37퍼센트에 해당하는 1018개 교회가 1년 경상비 1500만 원 미만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경상비 지출에 어떤 항목들이 포함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될 정도다. 일년 경상비 1500만 원 어느 구석에 목회자의 생활비가 끼어들 틈새라도 있는가?
▨… 목회자의 생활비도 “재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를 앞세워 그 불평등의 양상에는 눈을 감아버려도 무방한지를 이제는 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마치 목회자의 생활비는 성령께서 보장해 주시는 것인데 누가 어쩔 수 있느냐고 미뤄버리듯 한다면 그것은 능력주의에 성령이라는 겉옷만 입힌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어느 신학대학의 교수는 “목회자의 빈부격차와 호봉제”란 용어를 사용하였다.(한국성결신문 제1017호) ‘앗시시의 성자’가 추구했던 영성을 목회의 실천목표로까지는 삼지 않더라도 우리교단의 목회자들은 초기 성결교회에서부터 가난을 감수하는 전통을 지켜왔었다. 이런 분들을 향해 빈부격차나 호봉제라는 상스런 용어를 들이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타나는 이 한마디는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당부코자 한다. “큰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