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에게 가장 끔찍한 일"

손동식 목사(하저교회)
설교자에게 끔찍한 일이 있다면 ‘홀로’ 그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다. 삶의 곤고함으로 생명의 한 조각 떡을 기다리는 지친 회중들에게 생명의 떡을 전해주기 위해 그 높은 강단에 홀로 올라가는 일이다. 막중한 책임과 그러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설교자는 그 때에 현명한 옛 설교자들이 드리곤 했던 이 기도를 간절하게 드릴 것이다. “주님, 저는 저곳에 혼자 올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올라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결코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통로인 설교자인 우리 자신의 한없는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끊임없이 강단 뒤쪽에서 주님의 ‘동행’을 간청하고 간청할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설교는 그저 지식과 웅변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한 사람이 설교할 때 설교자 자신의 힘으로 설교하는 것과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에 관해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수준높은 교육과 교양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이 유식하게 말하고 강해하고 다른 많은 사역을 할 수 있다 해도 이 능력이 없으면 설교는 그저 재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믿음의 설교자들은 최선의 준비 위에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며 간구했다.

성경의 사도들과 옛 위대한 설교자들에 따르면 성령은 설교행위 속에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역사한다. 첫째, 성령은 설교자의 설교에 능력을 부여한다. 이러한 능력을 옛 설교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음(Anointing)’으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기름부음이란 ‘특별한 능력을 부어주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교자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설교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보잘것 없는 설교자의 설교를 비범하게 만든다. 오래전 스펄전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설교행위시 성령의 역동적인 일하심에 관해 이렇게 고백한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전하는 말씀을 느끼게 하며, 그 말씀이 여러분을 압도하게 만듭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그것에 압도되어 마치 땅 속으로 무너져 내리거나, 아니면 독수리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솟아 오르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며, 말씀을 듣는 회중들도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둘째, 성령은 말씀이 선포될 때, 회중 가운데 역사하신다. 물론 설교에서 설교자의 지성과 언변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는 ‘파리'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다. 궁극적으로 회중을 감동시키며, 회심에 이르게 하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인을 만드신다.” 스펄전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교시 성령의 역사로 인해 회중에게 일어나는 결과를 이렇게 묘사한다. 곧 성령은 “성도들로 하여금 고귀한 진리로 감동을 받게 하며,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며, 죄인들이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

성령! 성령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감히 저 생명의 강단의 계단을 오를 수 있겠는가! 끔찍하게 홀로 서 있지 말고 함께 올라 가시도록 주님께 간청하라. 진정한 설교를 위해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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