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731∼37)

본문을 묵상하며 일어나는 다섯 가지의 질문에 답을 찾다 보면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첫째, 주님은 왜 갈릴리의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손을 붙들고 무리를 떠나 가셨는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장애에 대해 본인의 죄 때문인지 조상의 죄 때문인지를 묻던 제자들의 의식을 고려해 볼 때(요 9:2) 불치의 병이나 장애가 죄에 기인한 것이고 하나님의 저주라고 해석하던 사회에서 주님의 안수를 구하는 이웃들을 둔 본문의 주인공은 복된 자이다.
하지만 말을 못하는 장애는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오히려 스트레스 지수가 더 높은 고통이다. 주님에게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이전에 고통 받는 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있었다. 한 사람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주님은 왜 당신의 손가락을 귀먹은 사람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셨을까?
말을 듣지 못하는 이를 직접 만지심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 사랑을 알았기에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과 함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적극적 사랑을 행하게 한 것이다(행 3장).
셋째, 주님은 왜 하늘을 우러러 탄식(신음)하셨는가?
이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질병과 저주와 죽음의 고통 아래 매어있는 인생을 향한 탄식이요 창조주의 신음이다. 하늘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며 피조물이 탄식하고(롬 8:22~23), 우리 영혼이 하늘로부터의 처소로 덧입힘을 바라며 탄식하며(고후 5:2), 우리 안에서 성령도 탄식하신다(롬 8:26).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던 주님의 사랑(요 11장)을 본문에서도 만난다.
넷째, 에바다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창조주의 선포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생겼고(창 1:3),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실 때 죽은 아이가 잠에서 깨듯 살아났으며(막 5장), 나사로야 나오라 하실 때 그의 영혼이 썩어가던 육신을 번쩍 들고 나오게 한 창조주의 선포다. 이 선포가 있었을 때 막힌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렸다. 우리 영혼에 이 음성이 들려지기를 축복한다.
다섯째, 주님은 왜 사람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며 죄에 빠져 고통당하는 이들의 대속물로 당신의 목숨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막 10:45).
그렇다. 온통 사랑이다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다. 영혼을 향한 사랑이다. 우리의 기도, 전도와 모든 사역의 동기가 한 영혼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일 때 주님의 나라는 왕성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