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할 존재 목적을 갖기 보다는, 살 길을 찾는 방법에 익숙한 한국경제가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실,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최근 불어 닥치는 경제 위기가 생존의 문제를 넘어선 영적 공황으로 치닫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매일 신문을 보고 경제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마치 주식이라도 투자한 개미 군단처럼 경제지표에 대해 근심어린 심정으로 정부의 경제정책에 내 나름대로 훈수를 두고 있다.

그러나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한국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서서 시대를 이끌기에는 너무도 신앙의 뿌리가 취약한 현실이다. 경제를 쫓아 교회에 몰려왔던 무리들이 다시 경제를 쫓아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주님의 음성에 이끌려 주를 따르는 것인데, 그동안 한국교회의 신앙은 세상의 음성에 이끌려 주님을 불렀던 것 아닌가!

목양 현장에서 흔들리는 신자들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며 권면해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어서 고민하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터 위에 설 수 있는 길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의 기치를 다시 들고 꺼져가는 성령의 불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성경은 배타적인 것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익숙해져 가는 다원주의 사상과 종교를 향해 진리를 선포하고 고백하게 한다. “나는 믿습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된 후에 주님이 오십니다. 복음은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때 주님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며 믿지 않는 자를 영원한 형벌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세상의 가치관과 싸워야 하겠다.

웨슬리 뉴비긴은 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의 영성은 바로 기독교적 신앙고백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서로 각각의 의견을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 “당신의 의견과 종교를 존중하는 마음을 전달한 후에” 강력한 배타성을 지닌 복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상대방이 믿거나 말거나!

복음이 분명하면 부흥의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천하 인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며 무너지는 신앙을 견고히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배타적 복음 고백 공동체를 세우고자 오늘도 목회 현장에서 현실에 부딪히는 고민을 풀어가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는 목회자가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할 것을 주장했다. 오늘은 더욱이 텍스트인 성경만으로는 너무나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콘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고서는 설교를 듣는 회중의 마음의 문은커녕 귀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로서 오늘도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말씀을 전하는 자는 스스로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도 나는 “성도들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찬송하며 고백하기를 바라는 목마름이 있다.

“주여, 주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현실에 찾아와 긍휼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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