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임세흥 장로는 평생 기도에 힘썼다. 새벽기도 자리는 사택 뒷동산이었다. 엄청난 학교 일, 특히, 설립과정에서의 그 힘겨운 일들을 오직 기도로 다 해결한 것이다.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많은 일들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 장로는 만사를 기도로 승리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제자 정현순 장로 증언이다. “선생님께서 새벽마다 큰 목소리로 기도하셨습니다. 맑은 공기를 타고 동네로 퍼져 내려오는 그 열정적 기도소리는 온 동네 사람이 다 압니다. 선생님의 기도 소리는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그 빠르고 경쾌한 음성에는 언제나 열정과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선생님의 기도자리는 무릎으로 자국이 나 있습니다.”

막내딸 임희덕 집사의 증언이다. “기도하러 올라가며 아버지는 찬송을 부르셨어요.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언제나 이 찬송을 부르셨어요.”

당신의 사명의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생명 길이니 가야한다고 다짐하는 임 장로의 눈물어린 가슴과 굳게 쥔 두 주먹을 본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소원은 오직 당신을 구원한 주님이시며,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주를 사랑하리라는 그의 각오를 느낀다.

“두서너 명이 앉을만한 기도자리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늘 기도해 오시던 자리인 거예요. 기도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나, 내려올 때도 아버지는 이 찬송을 부르셨어요.’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이번에는 힘차게 부르셨어요. 굉장히 힘차게. 확실하고 분명하게. 지금 저는 집에서 5분 거리의 교회로 새벽기도를 나가는데, 언제나 제 마음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본 아버지는 믿음의 사람이고, 기도의 사람이셨어요.”

교회의 일은 뒤에서 후원하는 식으로 하였다. 아무래도 신복성 장로에 대한 절제된 배려였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 장로는 자유롭게 교회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재정적 뒷받침을 많이 하였고, 특히 목사님을 지성으로 섬겨 목회사역에 많은 힘이 되었다. 박영숙 사모님의 내조와 끊임없는 기도생활이 임 장로의 사역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 임 장로는 1965년에 회갑을 지내고 다음해 병환이 났다. 2년 후인 1968년 5월 12일, 끝내 소천하셨으니, 64세였다. 쓰러지는 그날까지 당신이 사랑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장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는 자신이 평생에 마르고 달토록 밟고 매만진 흙, 학교부지 후포리 258번지의 땅, 친히 기른 자식들이 바글거리는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동산 양지바른 곳에 하관 되었다.

대신중·농업고등학교 교장, 임세흥 장로는 하나님 안에서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하여 줄기차게 달려오다가 그렇게 가셨다. 1994년, 대한민국 사학교육발전의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 받으셨다. 그는 진정 기도의 사람이요, 참 신앙인으로 국산본초학의 권위자, 덴마크갱생운동정신을 기초한 국민정신 생활계몽가, 민족교육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한 구국일념의 스승이요,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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