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은 업무상 횡령, 문서은닉, 사문서변조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전 교단 총무 우순태 목사의 무죄를 확정했다(한국성결신문 제1008호)는 보도가 있었다. 우 목사는 총무로 당선된 2011년 5월부터 계속된 고소고발에 시달렸다. 무려 16차례였다. 총무 재임 3년 동안 그는 법원 출입에 쫓겼고 총무 당선 전에 누렸던 공부하며 노력하는 목회자의 이미지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 “차라리 어리석음을 지키고 총명을 물리쳐 얼마간의 정기(正氣)를 깃들게 해서 천지에 돌리라. 차라리 화사한 것을 사양하고 담박함을 달게 여김으로써 맑은 이름을 오래도록 천지간에 남게 하라”고 채근담은 일러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공부하며 목회하던 목사는 총무 당선의 올가미에 묶이자 원하지 않던 길을 가야 했다. 그 모습이 상관없는 이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 우리사회를 ‘팔꿈치사회’라고 규정한 학자가 있다. 그는 우리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경쟁사회로 굳어져서 옆 사람은 벗이나 동료가 아니라 팔꿈치로 가격하여 떨어뜨려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라고 했다(강수돌·팔꿈치사회) 우리사회가 이런 팔꿈치사회로 전락하면서 지금까지 제시해왔던 정의와 복지라는 기본적 사회 가치와 인격성 회복이라는 절대 명제가 선언적 명제로 그쳐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 팔꿈치사회가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우리 성결인사회는 아직 그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강변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일까. 열 여섯 차례의 고소고발에 대해서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하는 동안 우리 성결인사회의 정의는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성결인 사회의 정의 실천에 대한 무관심이 결단코 은혜라는 말을 주야장천 입에 달고 사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일 수는 없음을 우리는 짐짓 모른체 한 것 아닐까.

▨… 촘스키(N. Chomsky)에게 누군가 질문했다. “(미국이란 사회에) 정직한 지식인들이 있을까요?” 촘스키가 대답했다. “권력의 야만을 들춰내고 사기극을 폭로하는 정직한 지식인은 그 사회의 제도권 안에는 없습니다.” 제도권의 자리를 탐내지 않는 이름 없는 목사 장로들이 우리 성결인사회의 정의를 말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부자가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우리 주님은 비(非)촘스키의 언어로 밝혀주시지 않으셨는가, 감히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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