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본초학 학자·의원

임세흥 장로는 원래 만주에서부터 본초학(약용식물학) 학자였다. 한국에 온 후에도 그의 실력은 유명했다. 서울대학교 교수이면서 동양의학관(경희대학교 한의대 전신)과 단국전문학관에서도 한의학을 강의한 신길구 선생은 당시 한국의 본초학 권위자였는데, 임 장로는 신길구 선생과 약용식물학에 대하여 보건신문 등에서 지상논쟁을 벌인 라이벌이었다.

대신중·농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임세흥 교장의 제자요, 원광대 한의과대학장을 지낸 신민교 박사가 자신의 저서‘임상본초학’에서 ‘본초학의 역사-근대한국 본초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신길구 선생과 함께 임세흥 장로를 그 효시로 소개한 것을 필자가 ‘인물전’에서 인용한 바 있다.

“국산본초연구에도 공헌하고 농촌 잘 살기운동을 직접 계몽하면서 실천했던 임세흥(1905~1968)은 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용식물학자 임기흥 교수의 배시로서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에 소재하는 대신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약초학 강의와 춘추계절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산야를 오르내리며 산지식을 직접 교육하였으므로 본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향학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자신의 공은 은폐하였으므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은 애국자이며 훌륭한 학자임을 공개하는 바이다. 필자는 대신농업고등학교에서 임세흥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년간 국산본초학 교육을 받았는데, 그것이 지금 본초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임 장로는 근대한국본초학, 특히 국산본초학에 유일한 권위자다. 신민교 박사의 증언이다. “보통 한약재가 300가지 정도 되는데, 그 중 국산은 40~50 종류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한약은 거의 수입약재라고 본다. 그런데 선생은 완전 국산 약재로만 약을 짓는다. 이런 처방은 한의학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국산본초학의 유일한 권위자인 선생은 그것을 평생 연구하고 가르치셨다.

해방 후, 만주에서 남한에 오실 때 두충, 감초, 지모를 씨로 가져와 서울뚝섬에 있는 서울약대실습지에서 재배했으나, 토양, 기후 등의 부적절함으로 크게는 성공하지 못했고, 한국의 두충은 선생님이 퍼뜨린 것이다.”

후포교회 정현순 원로장로의 증언이다. “러시아 땅에만 있는 ‘시나풀’이란 약초는 회충약 ‘산토닝’의 원료 등으로 쓰이는데, 한국 땅에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 찾아보면서 제자들에게도 찾아보라고 그 풀을 설명하셨다.”

이것은 국산본초의 우수성과 그 영역을 한 치라도 넓히려는 학자로서의 부단한 연구 자세였던 것이다. 국산본초 중에도 현지 근동에서 채취한 것을 주로 쓴 것은 한의학적 측면으로 특이한 것으로 선생의 애향·애족·애국사상이 들어있는 비법이라고 본다.

“선생은 12가지 병을 고치는 비법을 가지고 계셨는데, 특히 중풍에 유명했다. 쓰러진 당일에 12가지 약재가 들어간 약을 쓰면 두 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또 소아마비, 불임, 늑막염, 위장병 치료에 능하다”라고 후포교회 신공진 명예장로와 선생의 사녀 임희덕 집사가 증언했다.

그는 퇴근하면 바로 의원이 되어 사택에서 환자를 진료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렸다. 자상하게 환자들을 대해 근동의 주민들은 친절한 위로와 함께 임 장로의 용한 손길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어려운 사람들에겐 무료였고, 오직 인명구제의 사명으로 의술을 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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