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요11:50)

사순절 기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떠올립니다. 올해는 대통령 이·취임식이 있었던 기간이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때라 그런지 예수님 당시 정치 상황이 머릿속에 자꾸 그려집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며칠 전,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베푸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사람을 살리다니! 정말 놀라운 능력입니다. 온 유대 사회가 충격적인 기적을 목격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바리새인의 고관들은 딴 생각을 합니다.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그 파급효과를 두려워했습니다.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면 민란이 일어나고 로마 군병이 그것을 진압하는 혼란을 겪을 것으로 우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걱정한 것은 민족의 장래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이 누리던 지배 권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공회에서 ‘예수 한 사람만 죽이면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말로 권력 유지의 해법을 제시합니다. 말하자면 오로지 권력을 위해 아무런 흠이 없이 사랑만 실천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가야바의 결단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는 하나의 과정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비정함은 지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런 정치 논리에 희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시대 사울왕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왕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거역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마력을 가진 것이었나 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장님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은 한사코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집요함에 스스로 놀라 펑펑 울기도 했지만 권력 앞에서는 하나님의 명령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정치권력은 그렇게 비정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속성을 간파하고는 “군주의 도덕과 일반 국민의 도덕은 다르다”라고 노골적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런 비정한 정치상황에서 예외일까요?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뒤돌아보면 역사 속의 비정한 정치행위가 고스란히 묻어나옵니다. 6공화국 초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보내진 일이나 김영삼 정부 초반에 유행하던 ‘토사구팽’같은 말도 비정한 정치의 단면을 웅변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을 밀어준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대북송금과 관련된 특검을 실시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물론 집권자의 판단과 결심은 역사적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정치행위에는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도덕의 잣대와는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논란과 잡음이 생긴 끝에 이명박 정부가 새로 출범했습니다. 새 정부도 국민의 지지를 얻고 곧 있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민심을 통합하고 신음하는 민생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비정한 정치보다는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한 관용의 정치, 화합의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입니다.
정치권력의 속성 상 세상의 잣대로는 비정함을 버리기 어렵겠지만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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