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철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장)
부산대학교 교수가 총장 직선제 폐지 반대를 외치며 투신했다. 부산대는 교수들이 단식농성을 하고 탈진해 병원에 실려 가도 직선제 폐지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데 한 교수가 본관 건물 옥상에 올라가 투신하여 목숨을 버리자 상황이 달라졌다. 대학본부는 총장 직선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일이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버려야 이룰 수 있는 일인가? 누군가가 죽어야 가능한 일인가? 안타깝게도 선량한 사람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일이 이루어지는 패턴은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8세 여자 어린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을 기억하는가? 모두를 울분케한 이 사건이 있고서야 우리는 움직였다. 성범죄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촛불집회까지 했다.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학대받는 동영상이 방송으로 나오자 우리는 움직였다. 아동학대를 방지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부는 모든 보육교사가 아동학대자인양 어린이집에 CCTV를 설치하여 교사들을 감시하겠다고 궁여지책을 내놓기도 했다.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서야 우리는 움직였다.

정부는 모든 건물에 대해 안전평가를 시행했다. 그러나 15년이 훨씬 지나 2011년 발생한 우면산사태도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였다고 한다.

또 세월호에서 304명의 소중한 목숨이 버려지고서야 우리는 움직였다.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은 분향소를 찾아 유가족에게 다짐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았고, 광화문 앞에서 사람들은 아직도 농성 중이다.

건물이 붕괴되고, 어린 아이가 성폭행당하고, 교수가 투신하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고,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움직이는 사회가 안타깝다.

왜 이러한 패턴이 한국사회에 만연하는가? 누군가가 목숨을 잃거나 희생된 후에야 행동하는 패턴은 왜 계속되는가? 

욕심 때문이다. 욕심은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주위를 돌아볼 수 없다. 욕심은 자신에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에 주위를 돌아보는 배려를 할 수 없다.

욕심 때문에 눈이 멀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할 때 이기주의, 지역주의, 재벌세습, 대형교회세습, 재벌위주 경제정책, 정경유착, 파벌주의, 불평등 같은 죄를 낳게 한다.

이렇게 죄가 많이 쌓이면 사망을 초래한다. 사망은 육체적 사망만이 아니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는 성경말씀은 살아있지만 죽었다는 역설적 사건을 말한다.

죄가 자라나면 사망을 초래한다. 사망은 개인의 죽음뿐 아니라 공동체의 죽음도 의미한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소원하게 하고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욕심은 죄가 아니다. 욕심은 죄가 아니기에 욕심을 부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욕심에 눈이 멀어있다 보니 여러 가지 죄를 쌓고 또 쌓게 된다. 결국에 사람들이 죽는다.

욕심 때문에 대기업이 고위공직자와 정치인의 자녀들을 특별 채용하여 ‘특별한 배려’를 해줄 때 누군가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투신자살하고 있다.

욕심 때문에 4대강 사업이 40조 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하면서 무려 22조 원의 국민 혈세를 쏟아 부었지만 국민들은 파괴된 환경과 경제적 어려움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욕심은 죄가 아니니까 하고 욕심을 계속 부리면 누군가가 희생되고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때 우리는 또 잠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하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또 욕심을 계속 부릴 것이다. 누군가가 희생되고서야 일이 이루어지는 패턴을 끊기 위해서는 야고보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