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원 목사(소망세광교회·드루대 신약학 Ph.D)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본문에서는 ‘사랑의 빚을 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빚을 지다’는 ‘오페일로’(φελω)인데 그 뜻은 ‘빚지다’, ‘신세지다’, ‘갚아야 할 의무를 지니다’이다. 따라서 ‘사랑의 신세를 많이 지라’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본문 후반절에도 나타나듯이 받는 것보다는 하는 것인데, 사랑의 빚을 지라는 말씀은 그와 상반되는 행위로 의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본문 전반절의 헬라어순에 따른 직역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신세도 지지 말라, 피차 사랑하는 것 외에는”인데 이 원문순서에 따라 본문을 해석해 본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빚지다’에서 ‘빚’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좀 더 일상적인 표현은 ‘꾸는 것’이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부채’ ‘대출’ ‘융자’같은 개념이다. 본문에서의 ‘빚’은 이런 제반행위를 다 포괄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면 꾸지 말라는 말씀인가? 대출받지 말라는 말씀인가? 꾸지도 말아야 하면 꿔주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면 꿔주는 것은 비성경적인가? 많은 교회들도 부채가 있다.

그것은 비성경적인가? 돈을 대출해 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금융기관의 일은 비성경적인가?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는 정당하게 꾸고 갚는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시 37:26; 마 5:42; 25:27 등).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전체의 가르침의 맥락에서 본문의 ‘빚’에 대한 보다 적절한 이해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예외다”
‘아무에게든지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지면 안 된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사랑에 대해서는 예외다.’ 이 말씀은 사랑에 대해서는 손해나도록 줄 뿐 아니라 과분하게 받아도 된다는 말씀이다.

즉, 사랑의 주고받음은 부채와 대출의 관계와 같은 이해타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다. 우리는 그 빚을 더 많이 지고 체험할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 사랑의 빚을 많이 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서로 간에도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한다.

사랑의 빚은 져도 되고, 져야 한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가, 성도와 성도가 그렇게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랑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서로 사랑의 빚을 져야 한다. 사랑이란 부채, 대출 관계에서와 같은 이해타산의 관계가 아니다. 아낌없이 주고받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래서 본문 후반절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한다. “다 이루었느니라’의 헬라어 원문은 ‘플레로오’(πληρω)의 완료형으로서 좀 더 정확하게는 ‘완성하였느니라’이다.

율법은 따지는 것이다. 굉장히 정밀하고 분명한 것이다. 대출관계가 그런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 모든 따짐을 넘어서는 요소들이 있다.

사랑은 율법을 품고, 초월하고, 완성한다. 그리고 그 완성이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주고, 완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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