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룡 목사(서울강서지방·큰나무교회)
“예수 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진리보다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종교 다원주의자가 말하는 구원이란 대체로 한 인간이 자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편적인 관점을 경험하게 되는 것, 또는 자기를 비우고 궁극적 실재와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가 다양하며, 구원의 방식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나의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불교의 구원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무아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성불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구원관이다.

열반은 현실 세계의 ‘나’라는 의식과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로서,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무아적 구원이요, 비인격적인 구원을 말한다.

이러한 불교의 구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구원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슬람교는 신의 은혜보다는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고, 방법은 율법 준수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자력 구원에 속한다.

힌두교의 구원은 모든 자아의 욕망과 감정으로부터 초연해짐으로써 자아를 벗어나 브라만(절대자)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브라만은 비인격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근본 원리며 궁극적 실재라고 여긴다.

브라만 안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고,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결국 우주와 하나님은 하나이며,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이 구원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세계의 종교들은 각자 구원에 대한 개념이 다르고, 구원의 방법도 각기 다르다. 구원의 개념이 이처럼 다양한데 억지로 일치시킬 수는 없다.

문제는 과연 어느 종교의 구원관이 진리이며, 이 세상의 근본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있는가, 이 세상의 원리들과 가장 잘 부합되는가를 하나씩 따져 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구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컨대 힌두교는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우주 자체를 궁극적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현대 과학에 의하면, 현재의 우주는 우주 대폭발과 함께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우주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한 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우주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다. 우주가 죽으면 과연 누가 인간과 우주를 구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범신론적인 힌두교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우주의 무한성에 의존하는 불교의 한계도 여기에 있다.

이슬람은 우주를 만든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이 신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상상하지 못한다. 오로지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이슬람의 신앙체계에서는 신과 인간의 인격적인 사귐이나 관계의 회복이 불가능하다.

종교 다원주의는 한 인간이 자기를 비우고 궁극적 실재와 일치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격체인 인간이 비인격체 우주와 합일을 이루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바위덩이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설령 합일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이 비인격체라면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종교 다원주의의 구원은 이렇게 무의미하다.

인격체인 하나님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 나는 다른 곳에서 그 얼굴을 본 적이 없음을 알며,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없음도 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휴 로스 매킨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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