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중·농업고등학교

학교는 후포리 뒷골 730번지, 지금의 후포교회 자리에 있었다. 한일자로 지은 초가한옥 한 채와 일제시대에 면사무소로 쓰던 기와집으로 당시로는 그만했다.

임세흥 학원장의 한의원 소득이 보태지면서 학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듬해(1949년) 7월에 드디어 제1회 중학원 졸업생 29명을 배출했다.

신복성 장로가 여주군에서 불하 받은 15만 평 뻘밭의 땅콩농사로 학교형편이 더 좋아져 1952년 봄에 후포리 258 번지, 지금의 대신중·고등학교자리 일대의 6만 평을 학교부지로 구입하였다.

그리고 후포교회 교인과 주민의 노력봉사로 터를 닦고, 교실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실로 혁명에 버금가는 엄청난 역사였다.

두 분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으로 1953년 4월 20일 재단법인 대신학원 인가를 받고 7월 14일에 대신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신복성 장로는 이사장, 임세흥 장로는 초대교장이 되었다. 1955년 2월 16일에 대신농업고등학교 설립인가도 받았다.

두 분의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본다. 한 분은 사업가형이고 한 분은 교육자형이다. 한 분은 주민의 지도자로서 깊은 신뢰를 한 분은 신흥 교육자로서의 존경을 받았다.

학교는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그 후 학교 운영방법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두 분은 결별했는데,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처럼 한 둥지가 아닌 서로의 길에서 주의 일을 충실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세흥 장로는 교장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학교 발전에 매진하고, 신복성 장로는 교회 봉사에 전념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달란트를 갖고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인생의 황금기 20여 년을 한 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였으며, 그 중 삼분의 일의 세월을 하나 되어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은 역할을 분담하여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산 것이다. 그리하여 학교는 그 시대에 명문사학이 되고, 교회도 당시 경기지방에서 몇째 가는 유명한 교회가 되었다.
 
구국일념의 교육자
임세흥 장로는 생애를 걸고 학교발전을 위해 수고했다. 초창기에 교직원과 학생들은 그야말로 개척자정신으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땅을 파고, 지게로 흙을 날랐다. 과수원과 밭을 일구고 삽을 메고 아침조회를 했다. 누구하나 불평 없이, 열심히 땀 흘리며 공부했다. 교장 선생의 교육철학이 뿌리내리는 현장이었다.

교육이념은 복음과 신학문과 개척정신이다. 따라서 성경말씀으로 성장한 건실한 기독인, 신학문과 신 농업기술을 배우고 익힌 신지식인, 산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생활인을 양성해 국가와 사회에 참된 지도자를 배출함으로 빈곤과 무지로부터 민족을 구하고,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당시 대신중·고등학교의 교훈은 ‘1. 하나님을 사랑하자 2. 우리 민족을 사랑하자 3 우리 학교를 사랑하자’였다. 이것은 그룬드비가 주장한 덴마크개척정신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자’ 에서 따온 것이다.

선생은 한국이 사는 길은 복지국가 덴마크를 모델로 하여 혁신해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외쳤다. 덴마크의 국민교육운동, 국토개척조림사업, 농업혁신운동, 협동조합운동, 신앙혁신운동 등을 소개하며, 그 이상적인 복지국가 이미지를 각인시키셨다.

‘땀내를 향내로 알라.’ 이것은 교훈 외에 선생의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그는 친히 학교 농사 실습지에 나와 작업지도를 했다. 선생 자신이 곧 교과서였고,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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