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룡 목사(서울강서지방·큰나무교회)
“한국 기독교의 지독한 배타성과 공격적 선교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에서 한 질문이다.

그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는 주장한다. “나는 한국 기독교는 물론이고 기독교 일반이 지닌 배타성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해결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배타적이지 않고 편협하지 않는 올바른 신앙의 태도인가? ‘각 종교는 존중받아야하며 종교간 대화가 필요하다.’ ‘모든 종교는 평화, 즉 공동의 선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이 말은 다종교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다.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서로를 알기 위해 학문적으로 탐구하거나 종교인들이 힘을 합쳐 보편적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따라서 ‘예수만이 구원이다’라는 배타적 교리를 가진 기독교인이라도 남을 존중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은 다종교와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다 똑같고  그 배후에는 동일한 실재가 있으며, 종교마다 길은 달라도 결국 같은 곳으로 통한다고 믿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에는 동의 할 수 없다. 각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실재가 모두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어쩌면 제국주의적인 편견일 수 있다.

과연 모든 종교는 동일한 구원을 말하며, 그 배후에는 동일한 하나님이 있는 것일까?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예 중의 하나는 코끼리 예화이다. 누군가 코끼리를 가지고 와서 세 사람의 시각장애인에게 만져보라고 했다.

그 후 각기 무엇을 만졌는가를 물었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김씨는 이것은 나무라고 대답했다. 코끼리의 귀를 만진 이씨는 부채라고 답했고, 코끼리의 꼬리를 만진 박씨는 밧줄이라고 대답했다.

종교 다원주의자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인간은 코끼리의 각 부분을 만진 시각 장애인들과 같이 궁극적 실재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각 종교는 모두 똑같은 코끼리라는 궁극적 실재를 지향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비유엔 함정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시각장애인이라면 자신들이 만진 대상이 코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눈 뜬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동일한 코끼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종교 다원주의자들 중에 그 누구도 눈을 뜬 사람은 없다. 따라서 무엇을 근거로 모든 종교가 한 하나님께로 향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각 종교를 연구해 보면 모든 종교가 동일한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했고, 우주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인격적인 창조주이다. 반면에 불교는 창조주를 부인하며 공(空)을 궁극적 실재라고 본다.

공은 사물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의 공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르다. 또한 도가에서는 도(道)를 궁극적 실재로 본다.

일본 학자 가노 나오키는 “도는 인격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힌다. 성리학에서는 태극(太極)을 궁극적 실재로 본다. 하지만 태극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특히 동양 사상에서는 자연이 궁극적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모든 종교는 동일한 실재를 말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망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 14:6)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소경을 인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그 분을 본받아 그 말씀대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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