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흥(林世興) 장로는 1905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하여 신의주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1941년 봉천사범학교를 졸업했고, 공립 공태보농업중학교 교장과 계림자연대학 식물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본초학(本草學-중국 고래의 식물학, 약물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그는 사형제 중 차남으로 서울 서소문교회 사택에 기거하면서 YMCA와 연계해 전국을 다니며 민족의 장래, 농촌문제와 약용식물 활용에 대한 강연을 했다. 두 동생도 각각 경북의과대학 이비인후과 교수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가 됐다.

척박한 농촌을 택한 선각자
여주에서 신복성 장로가 소문을 듣고 임세흥 장로를 찾아왔다. 그는 후포교회 장로로 여주·양평·이천 지역 일대에 고구마를 보급하여 주민의 굶주림을 해결한 일명 ‘고구마할아버지’이다.

농민과 가난한 자를 위해 산 농촌계몽운동가이다. 그는 양계·축산 기술지도와 함께 영농학교인 사단법인 ‘계림원’을 설립하여 농민정신계몽과 선진농사기술을 가르쳤다.

대신 풍양동마을과 서울천호동개척단마을을 세워 피난민구호사업에 헌신했고, 농민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1946년 봄, 후포리에 대신중학원을 설립했다. 자신의 모든 소득을 쏟아 부었지만 운영난에 허덕이던 참이었다.

임세흥 장로는 대신중학원 실태를 알고는 자신의 사명이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그 즈음 서울에서 학교를 설립할 계획이 있었고 서울·수원 등지로부터 학교장 초대 교섭도 있던 터라 장시간 고민을 했지만, 모든 것을 접고 대신중학원을 택했다.

후포리는 신 장로에 의하여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을 뿐 예로부터 쌀로 유명한 여주 고을이 그렇듯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약간의 밭농사를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임세흥 장로는 원래 농업학교 교육자요, 약용실물연구가였다. 덴마크의 갱생운동을 모델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계몽운동가였다.

특히 그는 낙후한 농촌을 발전시킴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농촌운동가요,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믿는 복음의 전도사였다.

그의 사상은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그는 네온과 고층빌딩의 도시가 아니라 흙과 풀이 전부인 농촌에서 희망을 본 것이다.

후포리의 척박한 땅과 가난한 농민을 보고 덴마크농촌모델의 부흥운동은 바로 여기서부터 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박토(剝土)에서 기름진 옥토를 보고 헐벗은 산야에서 약초가 자라는 숲을 보았다. 수백 명의 학생들과 농민들이 노래하고 찬송하며 낙토를 가꾸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신복성 장로의 농촌계몽복지사역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순수한 신앙은 그와 맞아떨어졌다. 그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과 경험을 쏟아 부을 곳이 바로 여기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사명, 그리고 척박한 땅 후포리와 길 잃은 어린양들이 있을 뿐이었다. 임 장로와 신복성 장로의 만남과 임 장로가 쓰러져가는 신생학교를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렇게 임세흥 장로는 대신중학원 제2대 학원장과 후포교회 장로가 됨으로 제2의 생애를 시작했다. 당시 나이 44세로, 1948년 8월 17일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