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원 목사(소망세광교회·드루대 신약학 Ph.D)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여 …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롬 8:22~26)

본문에서 “탄식하다”로 번역되고 있는 ‘스테나조(στενάζω)’는 고통 받고 힘들어하면서 한숨 쉬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이 ‘탄식’은 비극적인 상태로 지속되는 고통보다는 회복이 약속된 소망 있는 고통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이 인상적인 단어를 본문 짧은 구절 안에서 세 번이나 반복사용하면서 우주적 구원의 큰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22절 피조물의 탄식
여기에서의 “피조물”이란 헬라어 ‘크티시스’(κτσις)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 전체를 집합적으로 지칭한다. 그 모든 것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탄식하고 있다.

20절에 보면 모든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고 하는데, “허무”(‘마타이오테스’ )는 가치 없고, 쓸모없는 상태를 말한다.

지금의 우주는 그 본래가치를 상실하고 존재목적을 잃어버린 상태에 눌려있다. 또 21절에서는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썩어짐, ‘프토라’(φθορ)는 파괴되고, 부패한 상태이다.

인류의 죄로 인한 ‘땅의 저주’(창 3:17~18)는 온 우주 안에 미쳐있고, 그래서 우주 안에는 썩고 부패한 것들로 가득하고, 아픔과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들은 진화론적으로나 환경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온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이다.

우주는 그 하나님의 저주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탄식(22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종식되는 소망이 있는 탄식이다(19~21절).

23절 인류의 탄식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속으로 탄식하는가? 그것은 아직 “몸(‘소마’ σμα)의 속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본문의 바로 전(前) 장인 7장과 8장에서 그 인간의 한계상황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이렇게 탄식한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소마’ σμα)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그래서 성경적 사고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노력은 언제나 한계적이다.

또한 세상 자체, 그리고 세상 안에 살아가고 있는 어떤 인간, 또는 어떤 세상제도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기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결국 실망한다. 그러나 그 ‘탄식’ 역시 구원의 결국이 약속되어 있는 소망의 탄식이다.

26절 성령의 탄식
성령 하나님의 탄식은 당신 자신 때문에 오는 탄식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타락하고 엉망이 된 이 세상과 연약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해 아파하고 탄식하신다. 탄식하며, 중보기도하신다(26절).

여기 26절에서 “간구하시느니라(‘후페르엔퉁카노’ περεντυγχνω)”는 그냥 간구가 아니라 법정용어로서, 무죄하다고, 또는 정상을 참작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재판장에게 탄원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죄악 됨을 아신다. 그리고 우리의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간청하신다.

거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다. 성도들은 그 성령의 인도와 탄식의 기도에 힘입어 결국 회복되고 다시 세워지고 종국적으로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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