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운동 최우수교회 총회장 표창

점촌교회는 보육원 신망애 애육원과 함께 세운 교회였다. 지성천 목사는 성 다미엔이나 조지 뮬러처럼 일생을 헌신하고자 기도했다.

지 목사의 점촌교회에서의 4년간의 목회는 잃어버린 자, 가난한 자, 가족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아버지로서의 눈물을 흘린 목회였다.

점촌교회가 점점 부흥되면서 고아원 밖에서 오는 성도들과의 갈등의 조짐이 생겨났다. 또한 그 지역의 유력한 장로가 시내요지에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적인 성결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지 목사는 그 비전이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점촌교회를 사임하고 장항동부교회로 부임했다.  

장항동부교회에 부임한 지 목사는 새벽기도회를 강화하여 부임 1개월 만에 60명이 참여했고 100명을 목표로 캠페인을 벌여 기도의 불이 붙었다. 교회는 은혜의 분위기로 생동감이 넘쳤고 300명 이상 모이는 중진교회로 성장했다.

지 목사는 교회의 모든 기관을 고루 조직하고 구역회와 성가대, 여러 기관들을 증편하여 교세를 확장시켜나갔다.

1977년 4월 4~10일 고난주간에 진행된 교단 주최 배가운동에 온 성도가 적극 참여하여 최우수교회로 선정되었고 제32회 교단총회에서 총회장의 최우수상패와 상금을 수령하여 교회는 축제분위기였다.

1978년 ‘모든 면에 배가 부흥의 성장’의 목표를 정하고 온 성도가 이에 총력을 기울여 그해 출석신자가 400명이 되자 1981년에는 800명을 목표로 부흥시켜나갔다.

1983년 교회창립 30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원의제3교회를 개척했고, 30주년 기념 찬양예배로 가나안, 할렐루야, 예루살렘 연합성가대와 정의여고 합창단, 남성중창단이 성대한 연주회를 가졌다.

장항동부교회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지 목사는 1984년 그의 사부 박석근 목사의 수차례 간곡한 권고로 안동교회로 부임했다. 

지 목사는 안동교회에서 큰 시련을 겪었다. 그에게 연단의 시기였다. 장남 동혁 군이 경북대학교 철학과 재학 중에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가고 안동교회도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동혁 군은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여 목회를 계승하려고 했다. 지 목사는 슬픔을 감추고 의연한 자세로 손수 맏아들의 장례식 집례를 했다.

당시 그는 “큰아들이 천국유학 가서 하늘나라 목회하는 영광과 아픔을 동시에 누리게 되었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지 목사는 안동교회선교회를 설립하여 어려운 12개 교회를 지원했다. 또 총회 해외선교위원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케냐 선교사를 도왔다.

안동의 류사랑병원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환우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복음을 전하며 병원의 발전을 위해 기도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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