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로 목사(미주총회 총무)

유진 피터슨이 쓴 ‘성공주의 신화를 포기하라’라는 책에서는 구약의 인물 요나를 다루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이방의 도시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요나는 전통과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떠난다.

피터슨은 이런 요나의 모습에서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경건한 이미지는 상실하고 세상과 잘 어울리는 경영자의 모습으로, 소명보다는 전통으로 굳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니느웨를 거부하고 다시스로 향했던 요나,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세상의 방법으로 성공을 추구하는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런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는 죽음이란 절망적인 벽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내던져진 요나는 큰 고기 뱃속에서 이제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하나님과 독대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희망이 끝나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기도를 통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최대의 단순함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자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면서 요나는 오직 하나님을 희망한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종종 절망이라는 벽 앞에 놓일 때가 있다. 질병, 실업, 이혼, 절교, 낙방, 파산, 전쟁 등의 절망이란 벽 앞에 설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한 끈은 최대의 단순함으로 얻어지는 희망, 비전이다.

인간이 절망하는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이다.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현재의 고난이 절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회상해 보면, 1960년대 민족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으로 피폐한 땅에,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기거하며 가난한 삶을 이어갈 때도 아이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절망하지 않았다.

의료시설이 열약해서 늘 잔병을 달고 살았지만 절망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아이들은 희망에 관한한 탁월한 존재들인 것 같다.

아이들은 주변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내일에 대한 무한한 희망 속에 살기 때문에 쉽게 그늘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의 단순함을 배워야 한다.

희망은 내 자신이 낮아지고 단순해질 때에 커진다. 그래서 단순한 신앙은 복잡한 신앙보다 더 파워가 있다. 복잡함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갈등을 유발하지만 단순함은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굳게 믿는 것이다.

단순함은 깨끗한 영혼의 울림을 가져온다. 이 땅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위대한 신앙인들은 단순함의 극치를 걸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가져야 하며, 이웃과 교회를 섬길 때도 단순함으로 섬겨야 한다.

이해타산이 없이 최대의 단순함으로 섬길 때에 변화라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강한 영성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어떻게 단순화 시켜서 하나님 앞에 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단순함은 희망을 극대화한다. 우린 단순한 믿음으로 희망을 굳게 잡아야한다. 또한 단순한 섬김으로 우리는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

희망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든다. 절망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 이 사회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절망이란 벽 앞에 섰을 때,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을 줄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궁극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이 계시기에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함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희망해야 한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단순한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삶 속에서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오는 절망을 이기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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