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륜(1648~1723)의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인조가 소현세자의 빈 강씨에게 죽음을 내릴 때에 몇몇 신하가 벼슬을 걸고 간하였다. 인조가 노하여 가고 싶은 자는 가라고 하였다. 그때 세자 효종이 나서서 아뢰었다. “임금은 반드시 벼슬에 욕심없는 맑고 곧은 선비를 조정에 두어 그 말을 듣고 써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조정에는 벼슬만 바라는 비루한 자들만 남을 것입니다.”

▨… 소수(疏首)란 말이 있다.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맨 앞자리에 이름을 적는 이를 나타내는 말이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이었던 이이첨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을 발의해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기도 했다. 그때에 영남의 선비 김시추는 장여화, 곽진과 함께 최고권력자 이이첨을 목베도록 요청하는 영남만인소(1621년)의 소수로 이름을 올렸다. 죽음을 각오한 상소였다.

▨… 나라가 성완종의 56자로 온통 난리법석, 뒤죽박죽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쓴 56자임에도 세자 효종의 아뢰는 말이나 김시추의 영남만인소처럼 짓누르는 무게감은 전혀 없다. 그러고 보면 나라 전체가 난리법석, 뒤죽박죽인 것은 그 씌어진 글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흩날리는 돈다발의 환영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진실이 무엇이든 글자 56개가 이 나라를 이렇게 뒤흔들었던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 비루한 자들만 남게 된다고 왕을 간하는 것도 아니고, 무한권력을 고발하며 만인소의 소수로 이름을 올리는 것도 아니면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헐뜯고, 비난하며, 끌어내리려는 행태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우리교단도 곤욕을 치루고 있다. 아니면 말고 식의 글들이 난무하는가 하면 의도가 빤히 보이는 루머를 양산하기도 한다. ‘내용증명’이 전가의 보도이더니 마침내는 총회장 직무정지 가처분까지 제소되었다.

▨… 퇴계 이황이 죽음에 즈음하여 그를 따르는 후배들과 후학들에게 “나의 명정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벼슬이란 벼슬을 다해본 퇴계의 유언으로서는 전혀 가당치도 않은 내용이지만 출세와 양명의 뒤안을 꿰뚫어 본 혜안이 남긴 못 이룬 꿈 아닌가 싶다. 우리 성결교회에는 ‘성결한 주의 종’으로 기억되기만을 바라는 이들만 있으므로 ‘소수’라면 몰라도 성완종의 56자 따위에는 어떤 면으로든지 현혹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아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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