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비열함과 치졸함을 가차없이 폭로한 작가로서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손에 꼽힐 것이다. 그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에서 한 주인공을 통해 우리의 간담이 서늘해질 한마디를 들려준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벌 주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이 왜 문제되어야 하는가의 질문이었다.

▨…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를 통해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인 나의 삶을 긍정한다면 타인들의 삶도 긍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혀 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삶은 긍정하면서도 타인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해져버리는, 그렇게해서 도덕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성을 뼈아프게 지적해 준다.

▨… 인류학자인 존 하퉁(John Hartung)은 한걸음 더 나아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역사의 교회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 밖에는 모두 증오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도 ‘살인하지 말라’는 기독교의 계명이 그 이스라엘 부족 구성원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 이해라고 주장했었다.

▨… 이 몇 년 동안 교단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송, 인터넷을 달구는 글들, 교단 지도자들의 행태는 네 이웃이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새삼스레 제기하게 만든다. 누군가를 교단에서 파면받게 하고, 누군가를 장로직에서 면직되게 하고, 누구보다는 비교우위에 서야겠다는 교단지도자들의 행태가 과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으로 증언하는 정의 세우기인가. 머리가 나빠서인지, 아리송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 할레스비(O.Hallesby)는 “영적 각성이란 곧 양심의 각성이다”라고 못박았었다. 양심을 포기한다면 하나님의 현존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알료샤의 증언아니겠는가.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작가 로렌스(D.H.Lawrence)가 “나는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길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가도록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차라리 두려움이다. 예술가가 되려면 인간은 그만큼 처절하게 종교적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했는데 예술가라는 말을 성결교회 목사로 치환할 양심이 있는지, 묻는다면 가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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