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막 16:12)

송창원 목사(소망세광교회∙드루대 신약 Ph.D)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br>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막 16:12)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 여러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그를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도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요 20:14), 물고기 잡던 제자들도 처음 한 동안은 알아보지 못하였다(요 21:4). 심지어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계속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마 28:17).

또한 본문사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록인 누가복음 24장에서도 두 제자들이 한 동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눅 24:16).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직면했을 때의 혼란스런 반응이라는 것을 감안할지라도, 예수님과 오랜 시간 함께했던 제자들이 그와 동행하면서 한 동안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요한 이유를 본문이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 후의 모습은 그 전과 ‘다른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른 모양’의 사람이 ‘다른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결국 확실히 알아보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부활 후 예수님의 ‘다른 모양’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까?

막 16:12절의 ‘다른 모양’에서 사용된 헬라어 ‘모르페 μορφ’는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이고 외관적인 모양보다는 내면을 드러내고 내면을 투영하는 모양을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이다. 또한 헬라의 종교와 철학에서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올 때의 온전한 변화의 모습을 위해서도 쓰였다.

신약성경에서는 본문 외에는 빌립보서에서만 두 군데 발견되는데, 2: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에서와 2:7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에서 ‘본체’와 ‘형체’로 각각 번역되어 쓰였다.

즉,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셨고, 온전한 종이 되셨다는 표현에 모두 ‘모르페’를 사용하였다. 마가복음 16장 본문도 ‘모르페’라는 단어와 함께, 부활을 통해 온전한 변화를 겪은 예수 그리스도의 달라진 ‘모양’이 나타나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와 동일한 바로 그 분이셨다. 그래서 결국 모두가 그를 알아보게 된다.

그 몸은 만져볼 수도 있는 실재하는 몸이었으며(눅 24:39), 심지어 십자가의 상흔도 남아 있었고(요 20:27),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다(눅 24:41~43).

그러나 그 몸은 완전히 변화된 몸이었다. 죽음을 이미 넘어선, 고통, 아픔, 연약함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몸이었다.

인간으로 오셔서 ‘종의 형체’(빌 2:7)로 나타나신 부활 전 예수님의 ‘모양’은 이사야에서 묘사하듯 약하고, 거칠고, 볼품이 없었을 것이다(53:2).

밤과 낮을 가리지 않으신 사역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와 온 인류의 죄 문제를 감당하셔야 하는 정신적 고통은 그 분의 육체를 여위게 하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이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유대인들은 당시 30을 갓 넘으신 예수님을 향해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어떤 연약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가장 젊고, 건강한 몸으로의 ‘변화된 모양’이다.

바울은 이 부활의 몸에 대해 ‘썩지 아니할, 영광스러운, 강한, 신령한 몸’(고전 15:42~44)이라고 감격으로 선포한다. 그 부활체의 모습이 장래에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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