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받은 건강검진에는 운전에 필요한 신체기록이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아직은 건강하고 운전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국가에 증명하는 행위를 하였으니 기특하다는 기분 좋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1980년에 나는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였다. 그 기억이 확실한 것은 우연히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는 한남동 길거리를 지나다가, 그곳 노점상에게서 운전면허시험 문제집을 받아 든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면허시험장에서 응시날짜를 받고 며칠 후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자동차학원에서 한 달 연수 후 곧 실기 테스트에도 합격하여 받은 면허증이었다. 남보다는 쉽고 빠르게 받은 면허증이어서 자부심이 있었다.
그 시절, 경제가 성장하며 삶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자가용 승용차 붐이 일었다. 문명의 가장 현실적인 이기를 갖고 편리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순수한 마음일 수 있었다.
당시 아이들 교육을 위해 먼 학군으로 옮겨가며 공부시키던 유행에 나도 질 수는 없었다. 교육과 사업을 목적으로 승용차를 구입하고 바쁘게 살아가던 모습은 나를 부끄럽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공직에 있는 봉급쟁이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초보운전자가 시승하는 중고차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차례 차를 바꾸어가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의 분수에 맞는 승용차를 나의 운전능력에 맞도록 운전하며 운전자의 기품을 곱게 지켜왔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 속에 내가 지불한 자동차 보험료만도 상당히 많았을 터인데 나는 그 보험 혜택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우리의 도로교통 형편이 복잡하고 몹시 어려운데 무사고 운전을 할 수 있었다는 자랑은 내가 받은 보이지 않는 혜택과 축복이었다.
승용차를 운전하며 얻는 기쁨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즐기는 일이고, 특히 아내와 한적한 시골 길이나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차창 열어 놓고 그 정취를 맛보며 여유롭게 달려가는 멋은 최상이다.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 늙으신 아버지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선산 성묘를 차로 모시며 이곳저곳을 고루 구경시켜드리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다.
학교근처까지 아이들을 태워다주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뒤로하며 돌아오는 아버지는 아비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사업상 승용차로 출장하며 얻는 성취감은 사나이들의 멋이었겠지만 나는 그래도 끝내 비싼 고급차나 외제차를 선호하지 못하였다.
운전하며 가장 아쉬웠던 일은 길가에서 태워달라며 손을 흔드는 시골 아낙네나 어린 학동들을 못 본 듯이 지나치는 일이었다. 좋은 일 하려고 선심 쓰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는 증언은 그런 일에서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도 나는 초기에 탈 없이 그들을 여러 차례 도울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고마워하는 알뜰한 인사도 받았다. 선행을 함부로 베풀 수 없는 살벌한 운전은 이 시대의 불행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낭비하는 꼴은 웃기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의 옳고 그름을 가릴 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자동차 운용은 필요악 중 하나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은 귀중한 생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위중한 행위이다.
나라 곳곳에서 터지는 정제되지 않은 과성장의 폐해가 드러나는 이때에, 나는 내 나이에 알맞은 운전면허 소유자가 되어서 분수와 주제를 가리는 바른 운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지켜야하는 운전의 덕목이며 무질서한 시대에 운전자의 품위를 지키며 문명의 편익을 선용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적성검사를 마친 새 운전면허증은 보름 정도 지나야 발급된다고 하였다. 10여 년을 주기로 적성검사를 하여서 운전자의 주의와 관심을 상기시키는 이 제도는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조급하고 경솔함으로 시행착오를 많이 일으키는 우리에게는 더 꼼꼼히 챙기는 보완과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