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마 26:69~75)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경황 중에 일어난 소위 우연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구체적으로 예언된 일이었다.
원어로 그 사건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예언은 베드로의 부인, 맹세, 저주맹세 전체를 이미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베드로의 부인과정은 어느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약함과 넘어짐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내보여 주며,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엄위하고도 실질적인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예언
베드로의 ‘부인’에 관해 사복음서에서 쓰인 단어는 둘인데, 하나는 ‘아르네오마이 ἀρνέομαι’이고 또 하나가 ‘아프아르네오마이 ἀρνέομαι’이다.
‘아르네오마이’는 일반적인 ‘부인’을 뜻하는 동사이고, ‘아프아르네오마이’는 ‘아르네오마이’를 강조하여 ‘강하게 부인하다’의 뜻으로 쓰이는 동사이다.
예수께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예언하실 때에는 강조형인 ‘아프아르네오마이’를 쓰셨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미 이 사건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가 일반적 차원의 부인을 넘어선 일련의 강한 부인의 행위를 할 것을 포함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부인, 맹세, 저주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적극적 부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부인”한다.
여기에서의 “부인”은 일반적 ‘부인’인 ‘아르네오마이’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배반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부인하지 않고 그 여종의 말을 부인하며 교묘히 상황을 모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첫 번째 대응에서 실패하면서 그의 심리적 빗장은 이미 무너져버렸고, 그래서 두 번째는 더 적극적으로 “맹세(‘오르코스 ὅρκος’)와 함께” 부인한다(개역개정: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그리고 세 번째 ‘부인’에는 ‘옴누오 ὀμνύω’라는 동사를 쓰는데, 이 말은 저주의 맹세까지 해가면서 하는 부정이다. 성경에는 “벌 위에 벌을 내리시리라”고 스스로에 대한 저주의 맹세와 함께 부정하는 상황들이 나오는데 베드로는 결국 그런 극렬한 부인을 하게까지 된 것이다.
소극적 대응의 결과
베드로의 처참한 실패는 그의 소극적 대응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을 멀찍이 좇다가(마 26:58), 그의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부인인 듯 아닌 듯 교묘하게 상황을 피하려고 하다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비겁함과 배반의 길로 줄달음질치게 되고 만 것이다.
소극적 회피에서 적극적 부인과 저주의 맹세까지 치달아갔다. 물론, 그의 행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에 힘입어(눅 22:32),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을 통해 극적인 반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가 겪었던 이 치욕적인 실패는 세상과 섞여 타협하기 쉬운 이 세대우리에게 여전히 준엄한 경계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