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그리고 결혼

정음전 권사는 1927년 9월 26일 황해도 장연군 속달면 영서리에서 유학자로 널리 알려진 정윤근 씨와 이임덕 씨 사이에서 5남 3녀 중 둘째 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유교를 신봉하는 사대부의 가정이었으나 그녀는 보통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 교회에 남몰래 다니며 믿음을 키웠다.

그녀의 고향 장연(長延)은 한국에 외국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이곳 출신 서상륜이 인삼 장사 차 북경에 갔다가 영국인 존 로스 선교사에게 전도 받고 세례 받은 후 그의 협력으로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고 출판한 성경을 고향에 가져와 전도하여 자기 집에 한국 최초의 교회 솔내(松川)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여 군 일대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마친 후 1940년 황해도 사리원고등보통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행실이 이름처럼 음전할 뿐 아니라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으나 당시 일본이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전쟁의 불길에 쌓여있을 때여서 제대로 공부하기가 매우 힘들고 고달픈 때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의 은혜로 한반도에 광복이 왔다. 마침 그때가 여름방학이어서 그녀는 고향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해방의 기쁨을 맛보며 새로운 국가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녀의 나이 18세, 꽃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 분단이 결정되었다.

그해 9월 소련군과 함께 소련의 앞잡이 젊은 김일성이 평양에 입성하여 토지개혁이란 미명 하에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는 등 공산정부를 수립해 갔다.

그녀의 고향 장연은 38선을 살짝 넘긴 북한 땅이었으므로 공산 치하에 들어갔고, 동시에 북한 전역에서는 소련군의 횡포와 북한공산주의자들의 행패에 시달리고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더구나 김일성이 주도한 인민위원회는 평일은 물론 주일 아침에도 주민 근로동원령을 내리고  불참하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박해임을 깨달은 신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가족 단위로 소련군의 경계를 피해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정음전의 가족도 북한의 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을 등지기로 결단했다. 그해 10월 경, 온 가족이 산속 수백리 길을 걸어서 38선 이남인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으로 피란을 했다. 연안에는 그녀의 큰 오빠(정덕교 씨)가 신한공사 연백농장의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동안 그녀는 오빠의 주선으로 같은 직장의 회계과장으로 근무하는 조종남 씨와 만나 사귀다가 1947년 4월 3일 연안온천감리교회 윤 목사의 주례로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남편 조종남 씨는 1927년 황해도 연백군 출신으로 3대째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다. 남편 조종남은 여교역자가 된 모친 최경애 전도사를 따라 신의주에서 성장하다 성결교회가 해산되자 모친을 따라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개성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취업해 사리원지점에 근무하다 고향 연안읍 금융지소로 전근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아 국유기업 신한공사로 회사명칭이 바뀐 후 회계과장에 재직하다 상사인 정덕교 씨의 중매로 결혼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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