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애육원의 발전과 중동교회 신앙생활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는 데는 중동교회 김용은 목사의 도움이 컸다. ‘삼성애육원’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그는 담임목사인 김용은 목사와 상의하여 지었다.

김용은 목사가  여기저기 주선하여 도청에 등록하고 기독교아동복지회와 세계구호위원회에 가입되어 구호물자가 들어오게 하여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초창기에는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자녀들이 함께 고생을 극심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CAC 책임자 세베지 씨의 도움은 애육원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신창동에 6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부속시설을 확장하여 삼성애육원은 좀 더 크고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삼성애육원에는 영아로부터 청년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이루며 대식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회로 배출시킨 사람들은 1800명이 넘고, 그 중에서도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3명이고 간호사가 20여 명, 회사 간부가 2명, 상업이나 공장 경영자가 5명, 공무원 5명, 교사가 7명 정도 된다.

지금도 이들은 성탄절이나 명절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선물을 사들고 자신을 키워준 삼성애육원을 방문하여 고마움을 표시한다고 하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녀는 남한테 많이 양보하고 잘 참는 성격이었다. 남을 먼저 배려했고 자신을 낮추었으며 말보다는 당신이 나서서 궂은일을 하였다. 검소했던 그는 힘써 일하며 남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남을 돕자는 것이 생활신조였다.

큰딸 황덕호 권사는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은행에 있는 빚 100만 원을 꼭 갚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늘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나보다 못한 아랫사람을 보고 살아야지 위만 보고 살지 말라”고 삶의 자족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정 권사는 10여 년 동안 삼성애육원의 원장으로 섬겨오면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강남대학교(전 중앙신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여 이론을 배우고 1964년 2월에 제8회 졸업생으로 학업을 마칠 때는 사회복지 이론을 실제에 잘 적용할 수 있는 관점과 안목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집사 직분에 충실했던 그는 1968년 3월 3일, 중동교회 성전 제2차 헌당식 때, 권사로 취임하였다. 권사 취임을 한 그에게 곧 슬픔이 닥쳐왔다.

평생을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신앙의 동지로서, 고아 양육의 사명자로 함께 기도하며 살아 온 남편과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그때가 1968년 7월 27일이었다. 향년 63세를 일기로 황인하 씨는 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특히 그가 정성을 다해 키운 고아들을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돌아갔을 때 장례식장에는 고아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남편을 먼저 보낸 그녀는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힘을 잃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울부짖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녀는 불끈 일어났다.

그리고 더욱 신앙생활에 전념하여 중동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며 헌신하였다. 1989년 1월 15일, 그는 김용은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기 5개월 전에 명예권사로 추대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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