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열 장로(전주지방∙정읍교회)
일반적으로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나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한다. 친구의 사전적 의미 또한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친구는 반드시 나이가 같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서로 허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 로이스 맥마스터 부욜은 “역경은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가르쳐 준다”라고 말했고,  ‘영웅론’의 저자인 스페인의 발타자르 그라시안 신부는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친구가 역경을 겪고 있을 때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바라만 보지 않고 그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과 지혜, 능력을 가지고 돕거나 협력하면서 고통을 분담하는 노력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진정한 친구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미국의 저널리스트 아서 브리즈번은 “좋은 친구는 일 분 안에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다. 말 한 후에는 좋은 친구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즉, 친구의 좋은 점도 있을 수 있지만 나쁜 점을 지적하여 개선해 나가도록 용기를 갖고 말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친구의 개념은 다양성을 갖고 접근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이 친구라고 딱히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류를 속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스스로 우리의 친구임을 자청하시고 겸손해 하시면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을 선포하신 것이다.

어느 목사님께서 자신의 소년 시절 겪었던 실화를 듣고 감동을 받은 바 있다.

어느 날 어머니 없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소년가장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피멍이 든 몸으로 비를 맞으며 처절하게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년과 친구였던 자신은 집단폭행을 하는 친구들을 말리지도 못하고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채 방관하고 있었다.

폭행당하였던 친구는 비를 맞으며 앞서가고 자신은 우산을 쓰고 뒤를 따라 갔다. 그 친구는 “엄마, 어디 있어? 엄마 보고 싶어”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엉엉 울고 가는데 자신은 우산을 쓰고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 목사님은 우산을 접고 앞서가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같이 비를 맞으며 “친구야, 미안하다. 친구야, 용서해다오” 라고 위로의 말을 하면서 어깨를 감싸 주었던 순간 그 소년은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주어 신앙생활을 같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친구는 성장해서도 훌륭한 신앙인이 되었고 자신은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처절하게 당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은 못했을지라도 그 불쌍한 친구에게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한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빌었던  위로의 말 한마디가 그 친구에게 큰 위로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내 이웃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노력이 복음을 심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친구 개념을 올바르게 깨닫고 실천하여 복음을 심는 능력자들이 다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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