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밝았다. 전도서는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라고 일갈하지만, 해가 바뀌면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을까, 막연하게나마 기대하는 것이 그 신앙이 성결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 범인들의 마음이다. 새해라서일까. 오늘따라 햇볕이 유난히 따스하고 저 멀리 내다보이는 눈 덮인 겨울산이 의연하기만 하고 소매 속을 파고드는 삭풍마저도 싱그럽기만 하다.

▨… 누가듣기라도 하면 새해에도 이뤄지지 않을까 지레 놀라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는 작은 꿈들이 있다. 개척교회 목사들은 대리운전 나가지 않아도 좋을 만큼만 후원해 주는 교회가 있었으면 하고, 은퇴 교역자들은 10여 년 동안 꿈쩍하지 않는 은급비가 조금이라도 올랐으면 하고, 여전도사들은 목사 안수와 청빙서의 부등식이 깨졌으면 하고 고개를 떨군다. 이런 꿈들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은 히스기야의 기도로도 언감생심일까.

▨… 희망의 본질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정의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우리 성결교회의 개척교회 목사들, 은퇴 교역자들, 여전도사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것일까, 절망을 주는 것일까. 히스기야의 기도로도 깨뜨릴 수 없는 벽들이 우리 성결교회 안에 진치고 있다면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가르침은 너무 냉혹한 것 아닐까.

▨… ‘신곡’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림보’에 발을 들여놓는다. 림보는 지옥과 천국 사이의 중간지대로 기독교 이전의 착한 사람 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나 이교도, 백치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묘사된다. 저들의 생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지만, 자기 관심사에만 몰두하느라 균형 감각을 잃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신곡은 기록한다.

▨… 무슨 균형감각인가, ‘아니요’ 할 것에는 ‘아니요’하고 ‘예’할 것에는 ‘예’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때 균형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회색이 도피처가 될 수는 없다. 새해에는 교단 안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런 꿈도 이뤄낼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고 교단 행정에서 예와 아니요가 확실해 지기를 기대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변혁 그 자체보다 오히려 변혁의 과정이다.”(블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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