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은 목사(서울중앙지방∙성락교회)
새해다. 희망처럼 새해에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1965년에 쓰인 ‘희망의 신학’ 그 서문에서 위르겐 몰트만은 이렇게 희망을 명상한다. “경험과 희망은…  서로 모순 속에 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고 있고 그래서 보이는 경험과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그것은 십자가에서 부활을 바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람은 그저 절망(絶望)한다. 희망이 끊어져버린다. 사람은 이제 그 무엇도 더 할 수 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부활이 솟구쳐 오른다.

말하자면 부활은 십자가에 대하여 모순이다. 이 부활이 기독교의 희망이다. 성경에서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온다. 사람은 예감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한가운데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몸부림한 사람이 에른스트 블로흐다. 그는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1938~1947년에  ‘희망의 원리’를 썼다. 주제는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이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이 글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많은 사람이 그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터전이 흔들리고 있지만 그들은 왜 그런지,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지 못한다. 이런 그들의 상태는 불안인데, 더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이다.”

한국 교회는 흔들리고 있다. 지도자들이 여전히 ‘다시금 부흥을’ 외치고는 있지만 이런저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보이는 속내는 불안과 당혹스러움이다.

한국 교회가 이른바 1907~1970년대의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없으리라는 분석이 현실적이다. 2050년 또는 그보다 빨리 한국 교회가 400만~500만 명으로, 그러니까 지금 신자 수가 절반으로 줄 것이란 예측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 교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걸어왔는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지난 세월 우리가 희망해 온 과정의 결과다.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진실하게 물어보자. 우리는 무엇을 희망했는가 말이다.

대형교회를 이루면서 동시에 찬반이 갈리는 일 없이 존경을 받는 목사가 그리 많지 않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존경하는 대형교회 목사님을 그분의 은퇴 즈음에 만났다. 그분의 말씀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나까지 포함해서 사실은 다 똑같았어요. 사람 많이 모으고 싶었고 큰 교회 만들고 싶었어요. 지 목사 세대에서 외적인 규모로 큰 교회 만들려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사역의 틀을 찾아야 한국 교회가 희망이 있을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목사님, 제 세대도 이미 늦었습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목회자들에게서 새 틀이 나와야 할 겁니다. 제 또래야 그저 더는 밀리지 않게 최선을 다해 자리를 지키는 거지요. 다들 밀릴 때 어디 밀리지 않는 보루를 만드는 작업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참혹한 전쟁이 낳은 절망 상황에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의 시민운동, 가톨릭을 쇄신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세계교회협의회의 희망 선언,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 운동 등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6·25전쟁 이후의 절망 상황에서 희망의 노래가 있었다. 잘살아 보자는 산업화의 노래, 사람답게 살자는 민주화운동의 노래 등이다.

우리는 21세기의 두 번째 십년대를 걷고 있다. 한국 교회는 무슨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하나?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 더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와 오늘날의 지구행성을 일깨울 무슨 희망의 노래를 갖고 있나?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마지막 문장과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끝 부분이 각각 이렇다. “사람과 세계는 충분히 선한 미래를 감당할 수 있다. 이런 근본적인 믿음이 그 안에 없이는 어떤 계획도 그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세계는 미래에 약속된 진리나 정의나 평화를 위해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미래 지평을 세계에 열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에 터를 둔 희망의 노래를 찾아가자. 새해다. 한 10년쯤 사람 사랑으로 삶을 살림하며 말씀 속으로 들자. 성서적 희망은 현상의 경험을 배반하며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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