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분노

“여기 한국 남단 서해 고도 임자면 진리, 평화롭던 이 마을에도 6·25남침의 혹독한 박해의 파도는 여지없이 밀어닥쳤다. 섬마을 복음화를 위하여 세워진 진리교회의 충성된 성도들은 공산폭도들의 유혹과 핍박 속에서도 더욱 믿음을 굳게 지켰다.

석 달에 걸친 공산치하에서 이판일 장로와 그 가족 12명을 비롯하여 교우 48명이 붙잡혀 칼과 창에 찔려 쓰러지고  더러는 손발이 묶여 바닷물에 던져지고 또는 총에 맞고 혹은 갯벌 백사장 구덩이에 생매장 되었다. 교단은 이 장한 가족의 순교신앙을 기리기 위하여 이 탑을 세워 만대에 전한다.”

위의 글은 전남 신안군 진리교회 앞마당에 세운 ‘48인의순교자기념탑’ 봉헌문이다. 이 탑은 6·25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혹독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숨져간 ‘48인의 순교를 기념하는 기념탑’이다. 교단 총회의 지원으로 순교현장이 멀리 보이는 교회앞마당에 세웠다.

높이 9m 모퉁이 직경 2m의 십자가형으로 이뤄진 이 탑의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있고 네 모퉁이에는 남녀노소의 순교를 뜻하는 4개의 작은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리고 대리석 3면에는 오석으로 정면에 봉헌문이, 양 측면에는 48명의 순교자 이름이 새겨져있다.

순교자 이판일은 1897년 1월 17일 전라남도 임자진리에서 부친 이화국과 모친 남경엽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향리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부친의 가업인 농사를 지었고 13세에 임소애와 결혼했다. 그는 새벽에 기상하면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앉아 쉬는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했다. 틈나는 대로 책을 가까이 하며 사색에 힘써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확립되었고 강직한 성격에 결단력 있고 존경받는 지역유지였다.

이판일의 젊은 시절은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기였다.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억압과 수탈로 신음하고 있었다. 임자도 역시 일제의 위협과 억압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목포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이판일이 지역유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일본제국에 대하여 불손하다는 이유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일본에 대하여 극도의 적대감을 갖고 있는 이판일의 행동이 그들의 눈에 거슬려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어느 날 일본형사들이 마을의 집회를 열고 병약자나 거동이 불편한 이를 제외하고 남녀노소 모두 참석하라고 엄명했다. 형사들의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명령이 두려워 주민 모두가 참석했는데 유독 이판일은 시종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형사 셋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보니 뜻밖에도 이판일은 주점에서 술상을 벌리고 있었다. 형사들은 거만한 이판일을 혼내줄 호기라 생각하고 주점으로 식식거리며 달려가 신경질적으로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당신이 이판일이요?” “예, 그렇소이다.” 이판일의 대답에 형사주임이 날카롭게 힐난했다. “당신은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예, 주민집회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형사주임은 이판일의 능청스런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이 다그친다. “그렇다면 고의적으로 불참했군, 게다가 집회에 참석해야 할 시간에 술집에서 술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이는 대일본제국의시책에 불복하는 행동이고 천황의 신민임을 거부하고 우리일본에 정면도전하는 행위로 보고 응분의 처벌을 하겠소.”

이판일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꼬이는 것을 느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반일본적인 언행이나 천황에 대한 모독은 일본이 최악질로 대하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자 이판일은 기지를 발휘하여 침착하게 응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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