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원 목사(소망세광교회∙드루대 신약 Ph.D)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헬 ‘디아코니아’)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디아코니아’의 동사형)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디아코니아’)에 힘쓰리라 하니”(행 6:1~4)

성령의 역사로 은혜롭게 진행되던 초대교회는 ‘성도관리’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 사건은 효율적인 교회의 직제를 수립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된다.

본문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쉬운 점은 원어본문에서는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강조되고 있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α)라는 용어가 개역개정 등 한글번역에서는 위에서 보는 것처럼 경우마다 다 다르게 번역되어 원 저자의 의도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섬김’, ‘사역’, ‘직분’ 등의 폭넓은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로서, 여기에서 ‘집사’(deacon)라는 단어도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그 의미의 포괄성으로 인해 번역과정에서 정확한 내용의 전달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단일사건에서 사용되고 있는 ‘디아코니아’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함이 더 적절할 것이며, 본문의 세 상황을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직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의 핵심 키워드는 예수님께서 몸으로 보여주셨던 삶의 덕목인 ‘섬김’이었다(마 20:28절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에서도 본문과 같은 ‘디아코니아’의 동사형이 두 번 사용되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그 과부들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원망했던 부분은 1절의 현 한글번역에서 읽혀지는 것처럼 단순한 ‘구제’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좀 더 폭 넓은 의미에서의 ‘섬김’ 즉, 교회의 관심과 돌봄의 행위에서 제외됨을 느끼고 불편해하였던 것이다.

그 복합적으로 쌓인 감정이 ‘식탁 섬김’(2절)의 문제로 표출되었다. 이런 문제에 휘말려 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된 사도들은 일반 ‘섬김’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말씀으로 섬김’(4절)에 ‘힘쓰기로’(헬 ‘프로스카르테레오’: 어떤 방해가 있어도 끝까지 열심히 계속하다) 한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전통, 사도와 집사의 전통에 서 있는 목회자와 직원의 사역 본질은 동일하게 ‘디아코니아’ 즉, ‘섬김’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직원도 목회자도 다 섬긴다. 누구와 무엇을 섬기는가?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긴다. 단, 그 매체와 방법에 차이가 있다.

직원들은 성도들을 접대하고 돌보고 챙기는 일로 섬긴다.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에 붙잡혀, 말씀을 선포하고 잘 가르치는 일로 섬긴다.

직원들은 육적 양식을 성도들에게 공급하여 섬기는 일을 잘 해야 하고, 목회자들은 영적 양식을 성도들에게 공급하여 섬긴다. 다 ‘섬김’이다.

목회자들은 사도들이 결단하고 실행한 것처럼, ‘프로스카르테레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일에 힘쓰고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또한 직원들은 목회자가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교회의 1차적 가치인 이 ‘기도와 말씀으로 섬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식탁의 섬김’을 책임지고 확실히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목회자와 직원이 각각의 ‘섬김’을 효율적으로 잘 감당하는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을 좇는 성경적이고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