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물에 둑이 무너진 것처럼 서구의 현대신학이 쏟아져 들어왔을 때 신학적으로 아직은 우물 안 개구리 일수밖에 없었던 신학도들 사이에 유행어처럼 번졌던 해학이 있었다. “성서학자들이 가장 비성서적이다.” 새롭게 소개되어진 문학비평적, 양식사적, 편집사적 성서연구방법론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찬성할 수 없는 입장 때문에 쏟아낸 촌철이었지만 성서학자들의 간담을 조금은 서늘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쯤은 겁도 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웃 집 얘기이지만 마음 놓고 떠들기에는 얼굴이 뜨뜻해진다. 웨슬리의 성화(성결)를 무슨 군대의 깃발처럼 흔들던 분들이 교단 대표 싸움 때문에 교단이 두 쪽 날 지경에 이르도록 이전투구에 빠지다니… 성화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비성화적이다라는 촌철도 성립할 수 있음을 모를 만큼 우둔하지는 않을 텐데, 일이 고약해지고 있다.

▨… 우리 집안에서도 영성훈련, 성결성 회복이라는 구호가 차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시대가 영성을 잃어가고 있고 성결성과는 담을 쌓아가고 있기에 그런 요청이 제기 되고 있는 것이라고 자위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부끄럽다. 우리 집안의 목회자들이 비영성적이고 비성결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자기비하이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영성과 성결성의 회복을 노래로라도 지어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비아냥대는 형편에 이르고 있다.

▨… 훼일링(F. Whaling)은 웨슬리의 영성을 평가한 글에서, 웨슬리는 기독교를 제도나 교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인격과 삶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증언했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인격,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삶이 웨슬리의 영성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웨슬리는 벌거벗은 채로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좇았다는 것이다.

▨… 어느 교회에는 그 교회의 담임 목회자였던 분이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표어가 걸려 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모든 공로는 신자들께, 모든 책임은 목회자가.” 이만한 영성이라면 평생 내 명의의 집이 없어도, 통장이 없어도 십자가의 길에 섰음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행여라도 성결을 주창하는 사람이 가장 비성결하다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면… 자기를 비우는 중이라고 변명이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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