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 박사(서울신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Iwajnnhjz s crusotomojz)는 247년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태어나 유명한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정치가와 법률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렇지만 23세에 세례를 받고 출세가도에 있던 세상의 지위를 과감히 던져버렸다.

374년부터 386년까지 안디옥 남쪽에 위치한 산에서 독거하며 수도생활을 했고, 386년에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 수업을 받았다.

397년 넥타리우스가 사망한 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디옥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거하여 404년까지 활동했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은 것은 그의 너무나 큰 명성 때문에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폭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제는 아카디우스였으나 실권은 유트로피우스에게 있었다. 하루는 유트로피우스의 학정에 못이겨 일단의 무리가 교회로 피해 왔다.

유트로피우스는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병사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병사들의 위협에도 크리소스토모스는 그들의 교회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트로피우스의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그를 처단하기 원했다. 성난 군중이 그를 뒤쫓았다. 유트로피우스는 이전의 군중처럼 교회로 숨어들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번에도 교회로 난입하려는 군중 앞을 막아섰다. 그 누구라도 도피성을 범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그는 고트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침입했을 때 피하지 않고 교구의 성도들을 돌보는 한편 고트족을 위해 성서를 번역했으며 고트족과 다뉴브 지역에 거주하던 스케테인들에게 선교사를 보냈다.

그는 성직자들과 관료들이 성적인 난잡함에 빠져 있고 우매한 것을 서슴없이 비판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대적이 생겼다.

그는 대주교 저택의 물품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자신의 봉급으로 자선을 베풀었고 만찬에의 초대를 거절하고 기거하던  오두막에서 초라한 식사를 고집했다.

또한 호화스러운 공중목욕탕과 길거리에 즐비한 거지들을 외면한 채 화려한 옷과 좋은 음식을 즐기는 무관심과 부도덕을 질타했다.

또한 당시 독신성직자가 ‘영적 자매들’이라 불리는 여성들과 함께 기거하던 관습을 비판했다. 이 관습은 이미 2세기에 교부 키프리아누스에 의해 강력히 비판을 받았고 니케아공의회(325)에서 금지된 것이었다.

그는 대주교로서 황제와 황후의 재물욕과 전횡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의 설교는 황후 유독시아에게는 가시와 같은 것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감동과 지지를 받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독시아는 크리소스토모스의 명성이 황제 아카디우스를 능가하고 있는 것을 극히 시기했다. 그러던 차에 유독시아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는데 크리소스토모스는 그곳에서 군중의 아첨을 개탄하는 설교를 했다.

정적들은 이 설교를 왜곡, 침소봉대하여 황후에게 전달했다. 이 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되었으나 황금의 입을 가진 크리소스토모스가 교회와 교통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폰투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편지를 썼다. 크리소스토모스는 407년 9월 14일경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모든 만물들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청빈과 진리 그리고 사랑의 진정한 실천자,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로 불리는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오늘의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교회와 성직자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는 교회, 그 밖에 사랑받아야 할 형제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직자의 성직자 됨은 자기 비움의 깊이에서 드러나고, 교회의 교회 됨은 영광과 거룩으로 포장된 담을 허물고 문밖에서 고통받고 있는 오늘의 나사로들과 한 상에 둘러앉는 데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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