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일 목사(문준경 순교기념관 후원회장∙정읍교회)
1972년 4월 창밖에 햇살이 빛나는 아침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자의 수기를 읽으면서 안이숙 사모의 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고난과 환난 그 자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 믿는다고 감옥에 가두고 교회 다닌다고 무자비하게 학대한 일본 사람들의 행위에 분노가 치솟을 때도 있었다. 안이숙 사모는 우리 역사의 빛나는 신앙의 모델이었다.

보통 순교자를 생각하면 남성 목회자들이 떠오른다. 일제강점기 대표적 순교자를 손꼽아 보면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가 첫손에 꼽힌다.

주기철 목사는 47세 때 옥고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순교는 일사각오의 순교였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고 그 신앙을 지킬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순교정신이다.

손양원 목사는 1938년 평앙신학교를 졸업 한 후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특별목회를 하신 분으로, 교인들을 보살피는 가운데 순교했다.

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두 자녀를 떠나보내면서 한 10가지 감사 답례 인사는 어느 때 보아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여성 순교자들의 헌신과 숭고한 희생도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우리 교단의 자랑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적 신앙과 전도 업적은 작고 약한 여성이라도 신앙을 통해 누구보다 강한 주의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2월 신안군 암태면에서 출생해 17세의 나이로 결혼하고 1927년 목포시 북교동에 이사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해 6월 세례를 받았다.

이후 1932년 5월 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방학 때마다 신안 섬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꾸준히 설립했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데 매진하던 문 전도사는 1950년 10월 5일 새벽 증동리 앞 백사장에서 공산당의 곤봉과 총탄에 60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전도에 일생을 바친 문 전도사의 헌신으로 증도에 신앙인이 많아졌고, 문 전도사의 순교는 그들이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국내 최대·최상급의 천일염 생산지인 증도는 현재 주민 2200명 중 90%가 교회 다니는 ‘천국의 섬’이 되었다.

증도의 어머니로 불리는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결과다. 훗날 48명의 순교자가 나온 임자도 진리교회는 그녀가 개척한 첫 번째 교회였다.

문 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수많은 섬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했고 의사, 간호사, 산파, 유모, 우편집배원 역할 등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했다. 1년 동안 고무신 아홉 켤레를 닳아 없애며 사도 바울처럼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문 전도사는 60세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작은 나룻배에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물품을 싣고 다니며 전도하는 성경의 어머니, 기도의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로 목회자로서는 아시아 유일의 여성 순교자이다.

문 전도사가 배출한 대표적인 신앙인은 한국교회 대표적 부흥사인 전 총회장 이만신 목사,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위해 전력을 다한 CCC 창립자 김준곤 목사, 치유목회 전문가 정태기 박사 등이며, 이 외에도 수많은 목회자를 배출되었다.

성결교단을 보면 철원교회, 병촌교회, 강경교회, 하리교회, 두암교회, 임자 진리교회가 순교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순교하신 외국 선교사 등 귀한 분들도 문준경 순교자와 더불어 천국에 가셨지만 그분들의 희생적인 사역은 지금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다.

특히 인도의 테레사 수녀는 87세까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본 평화의 수녀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은 훌륭한 여성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문준경 전도사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한 한 알의 밀알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말해주고 있는 신앙의 어머니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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