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 집사(큰나무교회∙영화평론가)
‘명량’이 연일 국내 극장가의 새로운 흥행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를 두고 리더십이 타락한 현 한국사회 속에서 대중의 강력한 리더십 갈망이 반영된 거라는 분석을 많이 한다.

소소한 드라마적 요소보다는 화끈한 스펙터클, 즉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해상 전투 장면의 시원함이 관객을 끌었다는 말도 있다.

반면 이순신 영웅화 작업이 군사독재 시절의 유물이었다는 점에서 하필 지금 시점에 왜 이순신인가 하고 이 신드롬 자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중 한 진보매체 칼럼이 내놓은 분석에 눈길이 간다. 세월호 사건 이후 국상 분위기에 빠졌던 우울한 현 사회 이미지로부터 탈출하려는 대중 심리가 반응한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그 칼럼은 이순신보다는 그와 함께하는 영화 속 백성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 ‘명량’이 ‘아바타’를 제치고 국내 역대 흥행 1위의 자리에 올라선 지난 토요일, 공중파 뉴스에서 내보낸 어느 한 관객의 인터뷰가 그걸 대변하고 있다.

“세상살이가 다 어렵잖아요. 영화를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세월호 사건은 국가 재난의 총체이자 현 한국사회의 모든 단면을 집약한 결정판 그 자체다. 우리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봐줬던 대한민국이라는 ‘탐욕의 바다’에 빠졌던 사건이 세월호 참사다. 우리가 그런 우리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토록 미안했고 무기력했던 것인데, 어느덧 그 피로도가 누적되면서 이제는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메커니즘이 발동한 거다.

이때 벗어날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합리화이고, 또 하나는 잊는 거다. ‘명량’은 그 둘을 확실하게 끌어내고 있다. 비록 몇몇 관료는 헛발질을 남발하나 백성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다 같이 힘을 모아 이순신 대장선을 침몰 직전에 구해낸다.

그러면서 우리가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뤄낸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부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과거가 현재를 덮어버리고 비극의 진도 바다는 ‘기적의 바다’로 재탄생한다.

이순신이란 소재는 현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기가 막힌 타이밍을 얻어낸 것이다. 성웅(聖雄), 거룩한 영웅. 감히 거룩함이라는 말을 붙인다. 이순신의 영역은 신성불가침이요, 그에 대한 비판은 신성모독이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우리 국민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따라서 ‘명량’의 흥행은 서사적인 완성도를 떠나 이순신의 명성에 기댄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순신의 업적을 관객들은 다 안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이고 어떻게 끝날지. 하지만 관객은 단지 그 화려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한국교회 또한 마찬가지다. 입에 단 소리만을 찾는 교인의 입맛에 맞춰 복의 원리가 강단을 점령해버렸다. 교인들은 어떤 말이 목사 입에서 나올지 다 안다. 하지만 그걸 듣고 또 들으며 마주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예화와 간증으로 위장한 성공담을 들으며 모로 가도 복만 받으면 되는 교인들은 그 성공을 향한 로또를 매주 긁어댄다. 그러면서 도그마만 남고 삶은 실종되어 갔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위기 사회는 그 책임을 외부로 돌린다고 지적하며 극우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로 칼날을 돌리는 일본 행태가 그러하다.

교회도 그렇다. 도덕적 치명상을 입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그 또한 그런 방법을 선택했다. 내부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타 종교와의 인터넷과 SNS와의, 문화와의 전쟁을 선포해 왔다. 내부 자정은 제쳐 놓고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대상을 찾아 살생부에 올리기 바빴다.

그러면서 삶 속의 진지한 예배자는 사라지고 어설픈 도그마의 투사들만 생산한다. 아드레날린 과다분비를 통한 극복은 최면이요 망각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럴수록 더 강한 먹잇감을 끊임없이 찾는 비극의 수레바퀴 속으로 빠져들기만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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