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5:13~14)

이규철 목사(경북지방∙안동교회)
얼마 전 중국 저장성 원저우 시에서 일어난 희대의 절도사건 뉴스를 읽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방범대원으로 일하는 장모씨가 정기 순찰을 하던 중 인적이 드문 길가 창고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안에는 엄청난 양의 음료수가 보관되어 있었다. 견물생심! 불현듯 욕심이 생긴 장씨는 평소 친구처럼 지내던 고물상 셋을 불렀다.

창고에 쌓여있는 음료수는 2000 상자, 3만 병, 대략 17만 위안(우리 돈으로 2800만 원), 장씨는 그 음료수병을 일일이 따서 땅에 쏟아버리고 막대한 양의 빈병과 폐지를 마련하여 고물상을 하는 그 친구들에게 팔았다.

그렇게 900위안을 번 장씨는 왠지 마음이 좀 꺼림칙하여 그의 고물상 친구들에게 200위안씩 나눠주고 자기는 115원을 챙겼는데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혀 철창행이 되었다는 기가 막힌 뉴스였다. 우둔한 사람의 우둔한 친구의 이야기가 뒤통수를 어지럽힌다. 

얼마 전 세월호 침몰 관련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선 단원고 학생들이 “날 구한 건 해경이나 선원이 아니라 친구였다”는 진술은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참다운 친구가 그리운 시절이다. 예로부터 친구 사이의 우정은 수어지교(水魚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금란지교(金蘭之交) 등과 같은 사자성어로 표기하여 장려하고 독려했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는 ‘도망치는 자’와 ‘곁을 지키는 자’가 참 친구 여부를 판별하는 잣대였다. 잠언은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언 17: 17)라고 말씀한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에서 “누가만이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 11)며 자신의 삶의 정황을 일러준다. 훗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한 누가는 끝까지 바울 사도의 곁을 지키는 우정의 사람이었다.

요한복음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참 친구’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실제 죄인 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참 친구로서의 희생을 다하셨다.

‘에릭 프롬’에 따르면 참 사랑의 본질은 희생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희생을 감당해 주셨다.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거룩한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셨다. 참 친구로서 말이다.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아주 깊고 친밀한 친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이다. 반면 슬픈 소식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친구로 살갑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시간을 들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참 친구이신 예수님과 손을 잡자.

친구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사랑의 감사(Thanks)가 넘쳐나고 주의 말씀을 통해 함께해 주시는 예수님의 우정을 느낄 수(Feel)있다. 우리 모두 참 친구이신 예수님의 친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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