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도미니칸 수도회를 만남으로써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17세에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했는데 가족들은 그가 수도사가 되지 않고 결혼하기를 원하여 한 여인을 끈질기게 소개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았다.
몇 년 후 파리에서 야콥의 지도로 3년간 신학의 기초를 공부했고 1245년 파리의 콜로뉴대학으로 가서 알베르투스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 기간 콜로뉴대성당에서 서품됐다.
그는 콜로뉴대학에서 공부할 때 183센티미터의 큰 키와 육중한 몸무게였음에도 말이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탔던 까닭에 동료들에게서 ‘벙어리 수소'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스승 알베르투스는 “너희는 그를 벙어리 수소라고 놀리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장차 이 벙어리 수소의 울음이 너무나 커서 이 세계를 덮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기도와 감성의 사람이었다. 기도는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장시간을 관상기도에 잠기기도 했으며, 성만찬 때에는 감격에 겨워 줄곧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학자였다. 50년 미만의 생애에서 60편 이상의 저작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자연의 원리에 관하여’, ‘젠텐치아 주석’ 그리고 ‘신학대전’ 등이 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중세 스콜라신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가장 현저한 인물로서 중세 신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의 설교자, 신학자, 철학자, 교수로서 계시와 이성, 신학과 철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철학은 이성에 의해 진리를 찾는 것이고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찾는 것이지만 이 둘은 조화되는 것으로서 “동일한 사물이 이성의 빛에서 고찰될 수 있을 때는 철학으로 취급되고 계시의 빛으로 고찰될 때는 신학으로 취급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성과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계시는 이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고 이성에 의해서도 입증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제일원인’ 또는 ‘제일동인’이라고 했는데, 마치 공이 구르는 것은 그것을 굴린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적 근거’라는 그의 신념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지성은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사고력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의 자질이다. 하나님의 지성을 인간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즉,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신의 성품이 곧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비교적 온건한 실재론자에 속하는데 ‘보편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윤리학에 의하면 이성이라는 하부구조와 신학이라는 상부구조가 있는데 이성은 플라톤 철학의 덕목 즉 용기, 절제, 지혜, 정의라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으로 이루어지고 신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초자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 두 가지의 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알게 되고 행복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결합을 이루는 것은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신학과 철학은 중세 신학의 최고봉으로서 일명 토미즘(Thomism)으로 불린다. 스승 알베르투스의 예언대로 벙어리 수소의 소리가 온 세계를 덮은 것이다.
그는 1274년 리옹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주여! 내겐 당신밖에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중세 이후 서양 철학과 신학의 최고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