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영적 웰빙의 유혹에 빠지면,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번창하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삶이란 혼자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형제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도록 하십시다.”

▨… 온 나라가 프란치스코 교황 돌풍에 휩쓸렸다. 그가 머문 4박5일 동안 신문도, TV도, SNS도 온통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하고 감격했다. 가톨릭 신자라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말과 행동에 ‘떡도 떡이려니와 합(盒)이 더 좋다’는 식으로 빠져 들었다. 마치 프란치스코 신드롬에 삼켜진 것처럼.

▨…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엇이, 어떤 모습이 이땅 사람들의 마음을 그에게로 쏠리게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의 자신을 낮춘 행보에서, 말에서, 눈빛에서 가난한, 외로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진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그는 말과 실천적 삶이 교회의 다른 여느 지도자와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었다고.

▨… 세존의 제자인 마하가섭은 세존의 누더기 옷을 물려받았다. 그는 평생을 그 옷 한 벌로 살면서 걸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훗날, 세존이 그렇게 사는 이유를 물었다. 마하가섭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 삶이 제게는 즐거움입니다. 또한 지금의 제 행동이 뒷사람들에게 어떤 규범이 된다면 그것도 즐거운 일 아니겠습니까.” 불가에서는 마하가섭의 가르침을 특별히 엄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 삶이 규범이 되었기에.

▨… 교황 방한으로 촉발된 프란치스코 신드롬은 이 땅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우리 성결교회에도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짐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마하가섭의 삶이 감당하기 어려운 규범으로 불가를 옥죄었듯이 ‘가난한 교회의 봉사자’란 역할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우리 성결교회를 옥죌 것이다. 이래저래 목사로 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힘듦 자체가 주의 명령이라면 편한 삶은 좀 더 일찍 체념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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