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목사(더감사교회∙전 본지 편집부장)
사역자가 사역을 펼쳐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도구 한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독서를 꼽는다. 학문 없는 목회가 될 수 없듯이 독서 없는 목회도 가능치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혹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시골에서 할머니들만을 앉혀 놓고 설교하는데 무슨 독서가 필요한가. 나는 아마존에서 원시부족들과 뒹굴어야 하는데 무슨 독서란 말인가 라며 항변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독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요즘 한창 이야기되는 독서요법, 독서치료 등도 성서와 깊이 연관이 있다. 그래서 독서치료의 영문명은 ‘Biblio Theraphy’이다. 저널, 읽기, 쓰기, 이야기 등도 들여다보면 모두 독서의 개념이다. 구약성경의 중요 개념 중에 ‘쉐마’를 드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매우 중요시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는 사람이 있고, 크게 읽어주는 사람이 있고, 암송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씀이 들리는 법 아니겠는가.

자녀교육은 큰 의미에서 독서와 토론에서 시작한다. 독서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자녀교육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이다. 수십만 원짜리 고액과외로 영어와 수학은 투자하면서도 독서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작 대학입시나 취업을 하려할 때에 문제가 되는 점은 언제나 논술과 토론의 기본인 독서에 있다.

지난달 한 일간지를 읽다 보니 눈에 띄는 기사가 떴다. 신촌과 이대 앞 어느 카페의 풍경에 낯익은 유명 대학교수와 함께 독서토론으로 열공하고 있는 샐러리맨의 동아리들이었다. 그들은 고전과 씨름하고 있었다.

저들이 할 일 없어 시간을 투자하고, 재정을 투자하고, 청춘을 불사르고 있겠는가? 아니다. 저들은 치열하게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바빠도 치열한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에 관한 어떤 프로그램을 보아도 저들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조용하지 않다. 유대인 청년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토론한다. 저들은 도서관마저도 토론 문화로 바꾸어 놓았다.

독서한 내용을 가지고 인생을 논하고 미래를 논한다. 둘만 모이면 할 말이 많다. 유대인들은 어린이나 노인들의 모임에서도 경전읽기 ‘독서’가 저들의 삶이다.

그곳엔 경전독서, 경전암송, 따라하는 소리, 그것을 듣는 소리… 소리, 소리, 소리가 메아리친다. 우리들은 토론하다가 싸움하기 일쑤다. 토론장에서도 우격다짐을 하려 한다. 토론은 논리로 주도돼야 하고 독서가 밑받침돼야 한다.

한국에선 논술을 시험성적 올리기 정도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성적을 높여서 대학입시와 취업에 적용해 보려 한다.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독서 요약본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도서관에 가서 읽을 책을 찾아도 원본은 없고 요약본 투성이다. 웃기는 얘기다. 최근에 청소년을 지도하는데 이철용 씨의 ‘꼬방동네 사람들’을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인천의 구립도서관과 학교도서관 여러 곳을 뒤졌으나 그 책은 보이지 않고, 배창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시나리오만 엮여 있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경제계나 기업체의 리더들은 독서그룹을 만들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몇몇 총수는 개인 독서교사를 두고 수백만 원씩을 독서에 투자한다고 한단다.

그런데 우리들 주변에 어떤 재력 있는, 믿음 좋은 집안에서도 성경(신앙)과외 교사를 두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고전독서의 꽃은 경전읽기요, 경전읽기에서 바이블을 빼고는 그 의미가 퇴색하는 법인데 우리는 성경마저도 5번 읽었다, 10번 읽었다고 자랑하려고 독서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이나 감정, 논리와 상관없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완전하시다. 목회자의 독서는 경전독서, 성경독서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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