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교양학부)
대중 매체의 발달로 문화의 영향력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가고 있다. 이전에는 문화를 특정 계층만이 누리는 호사로 여겼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우리 아이들은 각종 미디어로 꽉 들어찬 인공 환경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있다. TV와 라디오는 기본이고,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 등 문명의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자연스레 습득하고 있다.

이런 아이들은 이전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인류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그러니 부모시대의 소통기술과 방법으로는 그들과 더는 대화할 수가 없다. 코드도 다르고, 문법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큰일이다. 결국 교회도 이들을 제대로 된 차세대로 키워내지 않고는 미래가 불투명해질 텐데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이들을 어떻게 잡아둬야 할까?

결국 다시 문화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매체를 활용한 소통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들과의 소통과 통교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담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이들에게 익숙한 매체를 활용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일은 당면한 과제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인터넷, 영화, 드라마 등 손쉽게 만나는 익숙한 매체를 복음전파를 위한 정교한 통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눈에 도드라지지 않고, 앞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근히 살짝 그리고 깊숙이 신인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지 않고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요원하다.

그런데 이를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교회가 있다는 소식은 좀체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교회는 전통적 선교와 전도에만 매진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만 했더라도 좋으련만, 실제로는 그 반대 모습도 적잖이 노출한다.

즉 양질의 콘텐츠를 그들에게 주기에도 모자라는데 그동안 우리가 보여준 모습은 젊은이들이 즐기는 콘텐츠에 뚜렷이 반대하는 모습이었다.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내용에 훼손을 가했을 것이라 여겨지면 어김없이 상영금지, 방영금지, 취소요청 등등 네거티브 전선에 나서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현대 시민사회의 규정상 무작정 그들의 문화 사업을 힘으로 막아낼 수는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부정적 반대보다는 적극적 콘텐츠 제공이 오히려 그들을 복음의 마당으로 초대하는 길이 되지는 않을까. 그럼 어떻게 이 일을 도모해야 하는가?

역시 투자 외에는 답이 없다. 좋은 음악,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여행상품 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적극적 투자가 요청된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사업 역시 크게 보아 선교의 테두리 안에 넣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몇몇 청년들의 헌신에 기대어 찬양팀을 운영하고, 촌극형 선교 드라마만 재생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한 케이블 방송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무대를 장악한 구 전도사의 노력은 가상하며 애틋하다. 세상과 소통하고 젊은 세대를 끌어안으려는 그의 노력을 누가 감히 ‘일탈’이라 딱지 붙일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다. 우리는 그가 방송에 나와 예수의 십자가를 부르고 있을 때, 할리우드 영화 ‘노아’를 봐야하느니 말아야 하느니로 열띤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가 콘텐츠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나서야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이들이 보고 싶어 할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하고 교회는 투자를 지체해서는 안 된다. 이미 세상은 신인류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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