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색신문의 사전적 의미는 ‘흥미 위주의 기사가 많은 저속한 신문’이다. 황색신문의 시원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신문학에서는 대체로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허스트(W.R.Hearst)가 1895년에 뉴욕의 한 신문을 사들여 제호를 저널(Journal)로 바꾸어 발행한 때부터라고 본다. 허스트는 퓰리처(J.Pulitzer)의 월드(World)에 대항하기 위해 흥미 위주의 또 선정적인 기사들을 계속 게재했었다.

▨… 한때 미국 신문 전체의 편집방향을 삼켜버렸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위세를 떨쳤던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nalism)에 대한 강력한 반성과 도전은 교회가 주도했다. 윤리적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려는 황색신문이 스스로 정화하기를 요구하며 목사들이 거리로 나서 데모를 감행하였다. 마침내는 신문의 발행부수에 연연하지 않는 고급신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를 1908년에 창간하여 황색신문에 대립각을 세웠다.

▨… 인터넷의 발달과 SNS의 보편화로 활자매체인 신문의 역할은 차츰 위축될 것으로 예측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일간지들의 발행부수는 급격하게 줄어드는 추세다. 정기구독자의 감소도 현저하지만 전철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발견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이 그 명맥을 이어나갈 길이 있기는 한 것인지 신문 종사자들도 의기소침해지고 있다.

▨… 그 결과 우리나라의 신문들은 자신도 모르게 황색 저널리즘의 유혹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기사가 과장되고 때로는 왜곡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제목은 과격해지고 신문윤리강령은 아예 서랍 속에 밀쳐두어 놓는다. 발행부수가 신문의 최고 가치로 등장한다면 그 신문은 기필코 황색신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 교단 안에서 두 개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한 신문은 교단 평신도들이 주축인 후원회의 관장하에 발행되고 다른 한 신문은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어느 재력가가 발행을 후원한다. 우리 교단의 교세에서 두 개의 신문이 공존할 수 있느냐는 질문보다는 황색신문으로의 전락을 막기 위한 감시와 노력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창간 24주년을 맞으며 교단지로서의 사명을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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