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도 목사(서울강동지방∙곤지암교회)

오늘날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 정신으로 종교를 통합하려는 현상은 마치 누구나 수용해야만 하는 문화 패러다임으로서 지배적 담론을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거나 세상의 질타를 피해 적당히 타협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듯이 오늘의 이 선택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현재 이루어진 일에  바른 지향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에 맞추어 나가는 조심스러운 확장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복음에 빚진 자로서 새로운 비상에 대한 기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잃을 것 없이 이 세상에 왔으나 우리에겐 완수해야 할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마 3:1~3)은 ‘그때에’라는 말로 요한의 회개 선포와 세례 사건을 증거합니다. ‘그때’는 세례요한의 ‘때’이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때’도 될 수 있으며, 또한 미래의 한국교회가 당도할 ‘그때’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때로는 몰아치고, 때로는 잠잠하며, 때로는 달려가고, 때로는 쉬어 가는 리듬과 박자의 조화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여 타인의 관점에서 볼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행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합당히 결정하고 처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들은 많은 문제 속에 신음하고 있으며 세상은 믿음을 조롱하며 믿는 자들을 향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도저히 구원의 종교가 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많은 기독교 단체에서 그러한 여론에 반론을 제기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기독교를 향한 질책 속에서 우리의 무능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이 되도록 한다면…. 모자람의 위안과 보상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례요한처럼 맡은 바 직분을 감당하는 사명자에게는 나의 모자람은 결정적으로 주님의 능력을 모시는 주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정의가 있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확실한 실체를 원합니다. 본문은 복음의 논쟁 대상으로서의 천국과 지옥이 아닌, 암세포를 도려내는 의사의 칼처럼 오늘의 교회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며 닥쳐올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타협이 용인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복음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의 그리스도되심이 진리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약함, 두려움, 질병, 심판의 문제가 우릴 떠나지 않을 때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 주의 길을 준비하며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우리,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녹아지는 크리스천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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