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가 끝난 주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한 후배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단 목사님 상당수가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을 시작했으니 합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름만이라도 올리게 해 달라고 거듭 부탁하는 것도 거절했습니다. 꽤 서운했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는 이제 세월호 사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존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사태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목사들의 현실 참여를 편견을 가지고 폄훼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굳이 목사들까지 나서야 할 사안인가에는 이견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어느 날 몇몇 청년들이 방인근 목사님이 목회하던 부산의 모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광주와 관련한 온갖 흉흉한 소문들을 나누면서 분노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들은 광주를 위해 무엇인가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 있었지 결론은 없었습니다.

청바지 차림에 다소 왜소해 보였던 소설가 조세희 씨가 “뒤가 자꾸 돌아 보여서…”라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폭압적 권력이 무자비하게 언론을 억압하고 통제하던 시대에 성직자들의 저항은 시대적 당위이자 순교적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 이후 세상을 읽는 기존의 모든 이분법적 도식은 붕괴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각 시대 각 정부는 제각각의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역사는 누군가에게는 더디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저의 견해에 비판적인 분들도 작금의 언론이 외견상으로는 과도하다 싶을 만큼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리라고 여깁니다. 목사의 현실참여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세월호 사태에 대한 종교계의 1차적 반응은 자기반성이었습니다. ‘내탓’이라는 것입니다. 2차적 반성은 유족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방향 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국가적 조문정서에 기대어 보수진영 사람들은 대통령을 모시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진보진영 사람들은 진상규명을 매개로 반정부운동의 정치판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the next)이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마땅히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을 넘어 ‘그 다음’을 말해야 합니다. ‘개별적이며 특수한 재난과 비극을 넘어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인간의 비극성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종교는 결국 인간 비극의 끝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그 비극의 끝에서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며 인간 삶의 현실에는 언제나 그 비극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말입니다.

대학원 석사과정 두 번째 학기에 ‘비판철학연습’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라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의 ‘종교론’ 발제를 맡았습니다. 교수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에게 신(神)은 무엇인가?” 저는 성결교회 목사답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교수님이 내 대답을 잘랐습니다. 그분에게 ‘신(神)은 절대(絶對)’였습니다.

이때 절대란 말 그대로 모든 ‘대(對)하여 있는 것을 끊음’을 의미합니다. 고전적 제1철학의 이념이 절대라면 하물며 종교의 본질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 시대 목사의 현실참여는 복음 안에서 주류와 비주류, 보수와 진보, 노동과 자본을 함께 품는 자리, 바로 그 자리매김에서 시작되고 끝나야 한다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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