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교회 설립, 총회본부 간사와 사무국장

총회 행정의 달인
임용희 장로 이야기 ④은평교회 설립, 총회본부 간사와 사무국장

임용희는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아현교회에 출석, 협동장로로 주일에 다니다가 1962년 10월에 이정백 목사와 함께 서울역 앞 도동에 셋집을 얻어 서광교회(은평교회의 전신)를 개척했다.

처음 천막교회를 시작으로 판자집 교회로 옮겨 다니며 고생하다 1963년 총무 임기를 마친 이정백 목사가 대전의 교회로 전임하자, 전용한 목사를 모셨다. 그는 전 목사와 함께 서광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5년간을 보낸다. 1969년 서울 서북부지역의 발전을 전망한 그는 목사님을 설득해 은평구 역촌동에 대지 132평을 구입하여 60평 교회를 지어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교회 이름도 지역을 따라 은평교회로 개명하였다.

총회본부 또한 그의 타고난 행정적 은사와 1인 다역의 헌신적 봉사로 말미암아 점점 체계화 되어 갔다. 1968년에 총회본부 간사제도가 도입되자 그는 이종무 교육부 간사와 함께 서무부 간사가 되어 총회행정을 분담함으로 효율성을 제고했다. 그리고 1974년 헌법개정에 따라 총회본부에 선교국, 교육국, 사무국 등 3국이 설치되어 총회 행정이 체계화 되면서 그는 초대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여 총회의 서무, 경리, 재단 업무를 관장하는 실무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원만하고 화해와 협력을 생활신조로 하였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목사, 장로들이 모두 좋아하여 이런 인간관계가 총회의 정치 행정의 발전에 크게 작용했다.  임용희 장로의 용모는 미남이고 부드러웠으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호남형이었고 그의 대인관계는 원만하고 화해로우며, 낙심한 교역자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와 함께 위로와 격려로 힘이 되어주었다.

그는 이런 인품과 긍정적 사역 때문에 총회본부의 행정의 핵심요직에서 24년 동안 아무 탈 없이 근무할 수 있었으며, 총회의 요청에 의해 65세까지 연장근무를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총회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그는 매사에 ‘오케이’만을 외치는 무골호인이 아니었다. 외모는 지극히 호인풍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자기 신앙으로 점철된 삶의 철학이 확고하여, 사리와 신앙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단연코 ‘노’라고 발언하여 잘못을 바로 잡는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그 한 예로, 1986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전통적 애국가를 비판하고 이를 변경하고자 하는 사회적 흐름이 있을 때 이를 저지하는데 앞장섰다. 사회 일각에서 우리나라는 불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가 많은데, 유독 기독교가 신봉하는 하나님이란 말을 애국가에서 빼자는 것이었다. 이런 보도를 본 그는 즉시 총회장과 임원들을 설득하여 ‘국가제정 반대 성명서’를 기안하여 총회장의 명의로 기독교신문과 방송에 발표하여 이를 저지하는데 앞장을 섰다.

1979년 3개의 찬송가를 하나로 통일하자는 교단 대표의 모임에 이봉성 총무 대신 가끔 회의에 참석했을 때에도 그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장로교 합동측 대표가 새찬송가로 인한 막대한 수입 때문에 찬송가 통일에 미온적 발언을 할 때마다 “지금 하나 된 찬송가를 발행하지 않으면 기독교 역사 앞에 우리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여 통일찬송가를 발행할 것을 주장했고 이러한 노력이1983년 역사적인 통일찬송가를 발행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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