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2:11∼15)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는 과정에 주변 민족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사사를 세우셔서 백성을 보호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이미 충분한 돌봄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항상 부족하다고 불평하였다. 암몬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그들을 위협했을 때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자신들에게도 나하스 같은 왕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부러워했던 나하스왕의 군대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청년 사울을 통해서 그들을 크게 물리치신다. 이정도 되면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를 체험하고도 남은 것인데 자신들을 다스릴 왕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의 속내는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다른 왕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스스로 왕을 세우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혹시 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내심 허락해 주시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이미 마음은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서 떠났으면서도 말이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실만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신다.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13절). 뜨거운 것을 만지지 말라는 부모의 주의를 반복적으로 무시하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주 위험하지만 않다면 뜨거움을 경험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을 세워주셨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리한 고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이다. 백성이 원했던 통치 형태인 왕정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 이제 하나님께 혼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른 왕을 이미 예비해 놓으셨다.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울이 실패하기만 기다리신 것인가? 아니다. 사울 개인에게는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아주 충분한 기회를 주셨다. 왕이 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소년 다윗을 다음 지도자로 세우신 것만 봐도 그렇다. 그리고 실패한 왕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고통을 내심 즐기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어디 두고 보자!”고 한다. ‘우리’라는 단어 뒤에 비겁하게 숨었지만 결국 그건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다. 타인이 성공한 것에 대한 칭찬은 빈약한 반면 실패한 것에 대한 비판과 질타는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럼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한 일은?

장기동 목사(속사교회)
잘못된 지도자에 대한 책임은 그를 우리의 통치자로 세워 달라고 떼를 썼던 백성에게 있다. 그런데 뒷감당은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실천이다. 결국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기를 온전히 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에게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 삶에 온전히 실천하며 살기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오늘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그래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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