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6:1~8)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 세상에 부활이라는 새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30년 동안 파서 만든 가족 무덤이었습니다. 바위를 뚫고 만든 무덤으로 입구는 하나인데 속에는 여러 개 길이 있어 길마다 시신 여럿을 놓게 만들어져 있는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묻힌 무덤은 새 무덤으로 예수님이 처음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한 것입니다.

그후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예수님 생전에 부활한다고 한 말이 걸려 로마 군인들을 풀어 무덤을 지키게 하고 평소보다 더 무거운 돌을 굴려 막아 놓았는데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왜 무덤을 줘서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하였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이에 아리마대 요셉이 “3일간만 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빌려줄 수 있느냐”고 변명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고 토요일이 지나고 주일 새벽 일찍이 여인들이 무덤에 가 보니 빈 무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무덤 문은 열려 있었고 속이 텅 빈 무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곧바로 제자들에게 뛰어가 알렸습니다. 그때가 동녘이 붉게 물들어 올 때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을 영어로 ‘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이는 ‘동방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부활의 소식이 순식간에 세상으로 퍼지게 되었고 빈 무덤 소식도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빈 무덤입니다. 사람들은 무덤을 고집합니다. 그래서 무덤을 크고 호화롭게도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이 단지 3일만 필요했습니다. 부활하는 사람에게는 무덤이 필요치 않습니다. 옛날에는 무덤 속에 별것을 다 넣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이 단지 3일만 필요했기 때문에 사전에 무덤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 제자들이 3일 만에 무덤에 찾아가 보니 빈 무덤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무덤이 여전히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무덤은 빈 무덤이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해방입니다. 빈 무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어둡고 캄캄하고 비좁은 무덤 공간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왔다는 이야기는 자유해졌다는 이야기이고, 자유해졌다는 말은 해방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무덤에 그냥 있다고 한다면 갇혀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랬다면 오늘 성지순례자들이 모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을 것이고 그들 속에 우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3일 만에 살아나 빈 무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잡아 죽여 무덤에 묻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예수를 잡아 죽이는데 좌우파가 협력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들은 그날 안심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었다면 이 세상에 소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진리, 예수, 복음은 영원히 패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나 가르침 내용도 다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이고 진리가 승리하였다는 말이고 어둠 앞에서 빛이 승리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생명은 누가 가두고 밟고 불태워도 지워지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빈 무덤은 승리의 상징이고 거짓도 위선도 욕망도 다 이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리는 모두 우리의 죽음과 부활과 승리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잊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현장에 가서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저 사람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을 보면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곧 나의 처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 부활하심을 보면서 그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아무 상관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아무 의미가 없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할 것입니다.   

1945년 4월 8일 그날은 부활주일 아침이었습니다. 본회퍼 목사가 옥중에서 동료들과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옥문이 열리면서 험상궂은 군인 두 사람이 들어와 소리를 질렀습니다. “죄수 본회퍼 나와.” 본회퍼 목사와 죄수들은 그 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교수대로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그때 본회퍼 목사는 조용히 일어나 동료 죄수들에게 고별인사를 하였습니다.

“동지들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먼저 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천국의 소망을 갖는다는 것과 부활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활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이런 힘이 솟아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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