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그 중에도 고난절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교회는 주님의 고난을 회상하며 성도들의 경건훈련을 강조하기에 바쁘다. 평소에 하던 기도회를 특별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어 참여를 독려하고 성찬례를 행하며, 금식과 철야기도 그리고 성경통독 등 기도와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성장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때에 즈음하여 남미의 몇 나라에선 매년 사순절 직전까지 엄청난 인파가 모인 가운데 카니발 축제를 벌인다. 참여하여 즐기는 이들과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에겐 풍성한 눈요깃 거리가 되겠으나 대다수 보수적인 교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축제도 곧바로 이어지는 사순절 기간만큼은 의미있게 보내려고 그 전에 미리 실컷 즐겨두겠다는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뿐 아니다. 해마다 해외토픽에 단골로 오르는 기사와 사진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현하며 벌이는 행사를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이 스스로 자기 손을 십자가에 못박고 매달려 있는 장면이나, 채찍에 맞아 온몸에 피를 흥건히 적신 채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행진하는 모습 등이 낯설지 않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그런 위험하고 무모한 퍼포먼스를 감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주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다.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최고의 고통을 겪게 하시고, 고통의 극치인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런데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 고귀한 십자가의 죽음 후에도 온 세상 사람이 모두 구원받는 일은 지금껏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의 은혜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평화와 사랑 대신 전쟁과 테러, 탐욕과 증오 그리고 가난과 절망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남은 구원을 이루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남은 고난을 피하지 않는 희생과 수고가 사도의 사명인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 성도들을 모질게 핍박하고 고난을 안기던 자였다. 그런 그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몸소 고난을 겪는 전도자가 되었다. 해외 전도여행에서 당하는 끊임없는 고난도 바로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령의 은사를 활용할 때도 교회와 타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극도로 신중하고 절제했다. 한마디로 타인의 구원을 위해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을 채워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남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반드시 따라오는 고난을 기쁘게 감수하는 일이다. 인간구원을 위한 복음사역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예수님과 모든 사도들도 겪었으며 그 남은 구원을 이루는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한두 끼 금식하고 철야기도하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사실 금식과 철야기도는 약한 우리가 주님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힘을 구하는 일이다.

금식하고 철야기도하는 것은 귀한 일이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후에 어떻게 주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할지 고민하고 결심해야 한다. 얼마 전 돈 몇 푼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나, 주 68시간 노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과로사한 근로자, 100군데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고도 여전히 무직자인 청년들처럼, 우리 주변엔 외롭고 가난한 분들, 병들고 낙심한 분들, 옳은 일을 하다 박해와 압제를 당하는 이 등 사랑으로 돌아볼 이들이 너무나 많다. 교회마다, 그리고 온 성도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에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딛는 사순절이 되길 소망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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