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사순절이 돌아오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내가 이천 년 전,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던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 느끼는 이 열정과 눈물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갖게 되는 이유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는 함께하지 못했고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살피는 자였기 때문이다.(눅 22:54)

이사야 선지자도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기록하였다. 세상이 메시아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몰라서 그렇다고 제쳐두더라도,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고 따르고 있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정말로 예수를 따라서 붙잡아 가고 있는 자인가? 멀찍이 떨어져서 따르고 있는 자인가? 이 질문이 오늘날 사순절에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한 번쯤은 질문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위기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확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를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가? 그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십자가를 오늘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그 당시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관점에서 메시아를 받아들이려고 했고 십자가를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십자가는 군중의 이적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 거리가 있는 방법이었다. 특히,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킬 그런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가 아님을 알고부터 유대인들의 마음은 실망을 넘어서 분노로 극에 달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터무니없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만약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적을 일으키어 죽지 않고 살아 나셨다면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그들의 능력이 되었을지 모른다.

오늘날 예수를 믿으면서도 유대인들처럼 십자가를 표적을 일으키는 수단과 방법으로만 보려고 자신이 원하는 표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들 역시 이천년 전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자라면 멀찍이 예수를 좇을 자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간의 지성과 그 인식체계의 잠재력을 굳게 믿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지성으로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곧 창조주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도가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냐? 무엇이 지혜냐? 사람의 이성이 추구하여 정립해 놓은 법칙과 공식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인 교만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를 헬라인들처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자신의 이성의 틀 안에서만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려 들고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 역시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 있었다면 멀찍이 예수를 좇을 자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는 무능력의 극치였다. 로마 사람들은 “예수, 네가 왕이라면 왕다운 실력을 보이라”고 외쳤다. 리더는 리더의 자리에 걸맞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의 도를 바라보는 로마인들의 태도였다. 

하지만 성경은 말한다. 진정한 힘은 종의 리더십에서 발휘되고 섬기는 데 있다는 것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7~28)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로마인들처럼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힘의 논리, 세상적인 성공의 논리 안에서만 십자가를 바라보려는 것이다. 그들은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일뿐더러 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들 역시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자라면 멀찍이 예수를 좇을 자였을 것이다.

2014년, 사순절을 맞아 다시 한 번 ‘나는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자라면 어떻게 예수를 좇았을까?’ 질문을 던지며 다음의 가사에 답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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