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큰 머슴임을 보여 준 사례들

그가 장로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한 것은 ‘장로로 교회의 큰머슴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장로로 제직한 30년 동안 그는 묵묵히 ‘장로는 교회의 큰머슴’임을 실제로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많지만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교회의 중요한 기록을 낱낱이 기록한 서기(書記) 머슴 역할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썼고, 또 달필이며 명필이어서 기록하는 데는 달인이었다. 그는 집사 때부터 직원회 서기, 사무총회 서기였으며, 또 장로가 된 후 당회의 서기로 많은 기록을 남겨 필자가 2004년 북교동교회 80년사를 집필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둘은, 이근경 목사가 소천(召天)할 때 장례는 물론이고 유가족의 생활까지 배려했다. 1969년 홍순균 목사가 부산으로 전임하자,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령한 부흥사 이근경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셨다. 오랜 건축으로 성도들의 심령이 메말라 영적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서였다.

과연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 은혜가 충만하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날마다 부흥하였다. 그는 이 목사에게 안수를 받고 뜨거운 성령체험을 했다. 그러나 1970년 10월, 이 목사가 설암으로 소천하게 되자 이 목사를 맹종하던 신자들이 이 목사의 부활을 믿고 시신 옆에서 울면서 사흘 동안 찬송과 기도를 했다.

그때 그는 서울 출타 중 소식을 들고 급히 내려와 기도만 하는 신자들을 내쫓고 남자 집사들을 불러 시신을 입관하고 부고장을 인쇄하고 발송한 후, 교회장으로 5일장을 치렀다. 그리고 상동 야산을 사서 안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새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먼저 목사사택을 비워야 했다. 하지만 유가족을 내보내기 위해 전세금이 필요했으나 당장 교회 형편으로는 어려웠다.

그는 고민을 하다 철야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그는 당시 치리목사인 이봉성 목사와 상의한 후, 11월 당회에서 후임목사가 올 때까지 유가족이 목사사택에서 임시 거처할 것과 이 목사 사모를 보조전도사로 임명해 생활비를 지원토록 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김일환 장로가 무보수 임시 목회자가 되어 설교와 심방을 하게 하고, 후임목사가 결정되면 그동안 저축해 둔 목사봉급을 모아 유가족 전세비로 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고려대 출신인 이 목사 장남을 목포덕인고교 교사로 알선하여 취업하게 함으로써 고 이 목사 가족에 대한 처우를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충성된 종이었고 큰 머슴이었다. 그리하여 6개월 후 임현수 목사를 후임목사로 청빙해 교회를 정상화가 되게 했다.

셋은, 교회당 화재보험을 제때 갱신케 하여 화재 시 큰 도움이 되게 했다. 그는 1990년 김정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신 후 이듬해 5월에 정년으로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991년 12월, 교회당 옆 터에 선교센터를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건축 중이었으므로 교회는 이 건축에만 골몰하던 때였다.

그의 예감이었을까. 그가 기도 중 오래전에 교회화재보험에 든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는 김 목사를 찾아 화재보험의 갱신 여부를 문의하자 잊고 있었다면서 2일 남았다고 했다. 서둘러 갱신해야 한다고 일깨웠다. 교회는 부랴부랴 12월 22일에 납부금을 내고 보험을 갱신했다.

이듬해 1월 24일 밤중에 교회당에 뜻밖의 화재가 발생하여 119 소방차가 와서 진화했으나 교회는 석조만 남고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화재감식 결과 전기 누전으로 밝혀져 교회는 보험금을 받아 내부공사 후 교육관으로 사용했으며 선교센터 4층을 본교회당으로 사용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