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극히 혼란해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낡은 공동체의 끄나풀이 풀리고 개인의 자유가 커진 반면에 인간의 자기 확립 근거가 불안정해서 집단의 질서나 윤리규범이 흔들리고 있다. 또 사람들 사이에 정신적인 기아감이 퍼지고 대인관계나 어떻게 살까 하는 문제를 두고 절실한 고민을 안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이 시대와 나라를 책임지고 섬겨야 할 우리 교회들에 부여된 그 책임이 심히 무겁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제일 문제되는 것은 양적 사고만 할 뿐 질적 사고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하고자 모두가 서둘 때 세상은 시끄럽게 되고 자기도 남도 죽이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가난하게 되면 모두가 부자가 되는 역리의 진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치에는 선악은 없고 있는 것은 다만 승패뿐이다. 정치적 정의가 모든 인간에게 친절한 미소로 일관한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에도 없다.

정치적 정의에 있어서의 선악은 인간의 선악과는 다른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야 비로소 바로보는 거리에 서게 된다. 자연에는 아름다움, 사랑, 투쟁이 있다. 그러나 거짓은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자연이다. 우리들은 자연같이 진실해야 할 것이며 진실은 하늘의 길이요, 이것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성현들은 말하고 있다.

20세기 초에 어느 나라에서 “앞으로 우리는 신사회주의를 지향할 것이다. 신사회주의란 사람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다”라고 했다. 인간성이 상실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진실로 사람의 얼굴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품격(品格)이란 교육받아 체질화된 고상한 품위, 기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인격을 갖춰야 하고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어야 하는데 그 국격은 국민 개개인의 인격의 기반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개개인의 인격 형성을 책임져야 할 그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 크리스천의 온전한 품격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인줄 안다. 성경말씀은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사회의 현상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품격을 갖지 못함으로 이루어진 현상일진대 우리는 통곡으로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즉, 십자가에 죽는 순교적 일상의 영성으로 가능한 것이다.

인간 생명은 쓸 때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며 인생은 한 번의 무대에서 자기를 불사르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목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함은 주님의 생명의 빛을 반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죄악의 담이 앞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독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대인관계에 서 잘못은 우리가 외우는 주기도문 내용같이 당사자에게 직접 회개하여 용서받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날 교회 생활을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시대 이 나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앞날을 걱정하면서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지난날 썩은 울타리처럼 서로 다투다 도적을 막지 못하여 송두리째 빼앗긴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정의와 민주, 자유의 이름으로 민족을 팔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역사는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변화된 인격을 갖춰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서의 삶 자체를 보여줌으로 만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나라, 참 평화를 선포할 수 있는 동방의 아침 나라로서의 국격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 하지만 오늘날 어떤 면에서는 세상이 비웃는 미련하고 비정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제 우리는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몸의 때도 깨끗이 벗기고 순수한 알몸으로 주님의 저울 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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