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여기에 성결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성결교회도 오랫동안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각종 현안에 대해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현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성결교회는 교권주의에 반대하고, 선교중심적으로 세워진 교단이다. 성결운동은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의 교권주의에 맞서서 순수한 복음전도 단체로 출발했다. 그래서 성결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그 명칭을 복음전도관이라고 했던 것이다.
19세기 미국 감리교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성결운동가들을 여러 가지로 제약하고,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었다. 당시 감리교회는 성결복음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성결운동의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성결운동가들은 복음전파를 지상목표로 갖는 순수한 선교단체를 만들려고 했다. 1921년에 복음전도관은 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성결교회는 ‘전도본위의 교회’가 되기를 원했다.
둘째, 성결교회는 사역자 양성에 최선을 다한 교단이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의 여러 선교단체 가운데 토착사역자 양성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1907년 시작했을 때부터 성경공부반을 만들었고, 1911년에는 정식으로 경성성서학원을 시작하였다. 동양선교회는 토착민에게 가장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토착민이라고 생각했다.
동양선교회가 세운 성서학원은 기존의 전통적인 신학교육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역자를 훈련시켰다. 먼저 성서교육에 힘썼다. 그래서 성경전체를 통달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전도훈련에 힘썼다. 매일 오후에는 학생들이 서울시내로 나가서 전도를 했다. 성서학원은 전도훈련을 잘 시키기로 유명했다. 마지막으로 체험적인 사역자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초기 성서학원은 학생모집광고에 “우리는 성령으로 졸업장을 줍니다.”라고 썼다. 이런 사역자 훈련은 “신자는 장로교, 건물은 감리교, 목사는 성결교”라는 유행어를 만들도록 했다.
셋째, 성결교회는 독자적인 선교정책을 세웠다. 당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한국을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서 선교하는 지역분할 정책을 채용했다. 그리고 늦게 들어온 성결교회에 대해서도 지역분할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성결교회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성결의 복음은 특정지역을 넘어서 전국에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양선교회의 선교정책은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성결교회는 교세는 약했지만 전국에 골고루 분포된 교회를 갖고 있었다. 비록 장로교회는 강했지만 충청도와 강원도에 교세가 빈약했고, 감리교회는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1920년대에 전국 13도에 골고루 분포되었고, 전국적인 교단이 되었다. 지금도 성결교회는 경상도에서 감리교를 능가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기존 교파 속에서 자신의 독특성을 갖고 사역을 했던 것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심한 정체현상을 맞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부흥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 역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초기 성결교회의 전도본위의 정책, 현장중심적인 사역자 양성, 독자적인 선교정책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특징이다. “역사를 모르는 자는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산타냐의 명언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