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톰슨(W. Oscar Thompson, Jr)은 ‘복음은 관계의 노선 위로 흘러간다'라는 명제를 남겼다. 관계라는 단어는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이며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대부분이 관계라는 요소로 짜여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답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본적인 관계들을 설정하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수직적인 관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수평적인 관계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올바르게 확립할 때 다른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며 조화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관계의 망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관계를 떠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셀 패티슨(E. Mansell Pattison)의 분석에 따르면 정상적인 사람은 사회심리학적 체제 안에서 약 20~30명과 관계를 맺고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가고 모든 문화에는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의 목회지가 어디든,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든 관계하지 않고,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관계 망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서로 용서하며 신뢰하며 살아간다.

모든 관계는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이다. 신약에서 복음 전도 방법은 언제나 처음 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수립된 관계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흘러가기 위해서는 ‘관심의 동심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흘러가게 된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전하기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 그리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42절)라고 기록되어있다. 안드레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다른데 가서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 형인 베드로에게 전하고 데리고 왔다. 베드로가 동생의 말을 듣고 따라온 것은 평소에 동생의 말을 신뢰했고, 동생과 인격적인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빌립이 제자로 선택을 받는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그 기쁜 소식을 가지고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다. 나다나엘에게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절). 빌립의 말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46절)고 말한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나사렛에서는 메시야가 나올 동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말하기를 ‘와 보라’고 강권한다. 비록 나다나엘이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할지라도 친구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둘 사이는 생각이 틀려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인격적으로 맺어진 신뢰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

복음은 이렇게 관계의 노선을 따라 흘러가게 된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파괴된 관계위로는 복음이 흘러가지 않는다. 깨어진 관계 속에서는 감동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깨어진 공동체 속에서는 신음과 좌절과 불평의 소리만 더 커져가게 된다. 복음은 건강한 신뢰의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흘러가게 된다.

미국의 교회성장연구소에서 1만4천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당신을 하나님과 교회로 인도한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서 75~90%의 사람들이 친구나 친척, 이웃과 같은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의 문제는 관계성이 깨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깨어진 관계가 계속 진행되면 결과는 너무도 자명해진다. 우리 공동체에는 더 이상 복음이 흘러가지 않는다. 곧 썩는 냄새로 진동할 것이다.  문제의 해답은 간단하다. 우리의 모든 사회적인 관계 망속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십자가의 거룩한 피가 흘러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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